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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에서 온 편지]27.런던 부동산, 검은 돈의 메카?

함정선 기자I 2018.01.29 08:15:24
런던 노팅힐 지역주택가(사진=이민정)
[런던=이데일리 이민정 통신원] 영국 윌리엄 왕세손 가족이 거주하는 켄싱턴 궁전이 있는 켄싱턴 지역을 비롯해 첼시, 메이페어, 베이스워터, 노팅힐 등 런던의 전통적 부촌을 가보면 고급 주택들이 즐비해 있습니다. 거리도 다른 주택지구들보다 깨끗하고 정원도 잘 가꿔져 있으며 CCTV 등 보안 장치들도 어김없이 구석구석 설치돼 있는 것을 볼 수 있고요.

그런데 이렇게 고급스럽고 유서 깊은 런던의 고급 주택, 부동산 등은 국제범죄조직 또는 세계 곳곳의 독재자와 부정부패 관료들이 축적한 검은돈 세탁의 온상이라는 오명이 짙습니다.

한 예로 2011년 사망한 독재자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대통령 집안이 강탈한 재산을 몰수하는 과정에서 카다피 아들 중 한 명인 사디 카다피가 런던 햄스테드가든 서버브 지역에 약 1000만파운드(약 144억6500만원) 규모의 맨션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죠. 사디는 영국령 조세회피처 버진아일랜드에 세운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이 맨션을 구입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최근 영국 BBC에서 방송하는 드라마 ‘맥마피아’(McMafia) 덕분에 전 세계 검은돈 유통의 중심에 있는 런던의 역할이 다시금 주목과 비판을 받고 있습니다. 맥마피아는 러시아 마피아 거물의 아들로 태어나 런던에서 헤지펀드를 굴리는 주인공 알렉스가 아버지의 세계와 엮이면서 겪는 온갖 범죄를 다루면서 그 중심에 있는 런던을 부각하죠.

국제 범죄조직들은 부정부패, 마약, 무기, 원자재 등의 불법 거래 등을 통해 모은 검은돈의 출처를 은닉하거나 세탁합니다. 검은돈을 합법적인 사업을 통해 벌어들인 것처럼 꾸며 더 많은 수익을 내기 위한 불법활동에 재투자하기 위해서죠.

예를 들어 범죄조직이 돈세탁에 많이 이용하는 카지노의 경우 불법적으로 모은 돈을 카지노에서 잭팟을 터뜨린 것으로 꾸미면 법망이나 세무당국의 의심을 피해갈 수 있습니다. 또한 돈의 출처와 자신의 신분을 속이기 위해 가명으로 금융기관에 계좌를 만든 다음 파나마, 버진아일랜드 등 탈세도 할 수 있으며 폐쇄적이고 금융거래 비밀 등이 보장되는 조세회피처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워 그곳으로 자금을 이전합니다. 이후 글로벌 부동산 등 합법적인 투자처에 다시 투자해 깨끗한 돈으로 세탁하는 수법도 자주 사용합니다.

글로벌 범죄조직들이 합법적인 투자처이자 검은돈을 세탁하기 위해 가장 선호하는 곳 가운데 하나로 바로 런던 부동산이 꼽히고 있는 것이죠.

지난 2016년 글로벌 반부패 기관인 트랜스패런시 인터내셔널 조사에 따르면 3만6342개의 런던 부동산이 해외 조세회피처 등에 세워진 페이퍼컴퍼니 등을 통해 구입된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이 기관은 이 가운데 상당수가 조직범죄 집단이나 부패한 외국 관료들이 돈의 출처를 숨기기 위해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익명으로 런던 부동산을 사들인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습니다. 런던경찰 반부패조직 조사에 따르면 부정부패로 사법당국의 조사를 받고 있는 사람들이 보유하고 있는 런던 부동산의 75%가 해외은닉처의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구입한 것으로 드러났죠. 런던경찰은 대규모 국제범죄조직이 불법적으로 모은 자금은 대체로 부동산 시장에 유입되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고요.

런던 부동산은 어떻게 검은돈 세탁의 메카가 됐을까요. 런던 부동산 시장이 호황을 이어가면서 좋은 투자처라는 인식과 함께 무엇보다 부동산 소유자에 대한 정보공개 규정이 느슨한 것이 요인으로 꼽힙니다. 조세회피처든 아니면 해외 어느 곳에 세워진 이름뿐인 회사라도 실제 누가 부동산을 거래하는지 공개하지 않고도 런던 부동산을 사고 파는 데 무리가 없죠.

이들이 런던 부동산을 사기 위해 해외은닉처에 숨겨 놓았던 돈을 런던 금융기관 등을 통해 들여오더라도 돈의 출처나 신분 등에 대한 깐깐한 조사는 없습니다. 일각에서는 은행들이 대규모 거래 수수료 등을 챙기기 위해 돈의 출처가 의심스럽더라도 송금에 협조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고요. 한편에서는 은행 금융시스템을 통해 하루에 거래되는 돈의 규모가 엄청나기 때문에 검은돈을 모니터링하고 적발해 내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분석도 있습니다.

버진 아일랜드, 지브롤터, 저지 등 영국령 조세회피처가 많은 것도 런던 부동산이 검은돈의 메카가 되는데 기여한 것으로 꼽힙니다. 일간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법인명으로 구매한 런던 주택 가운데 3분의 1 이상이 버진 아일랜드에 있는 익명의 회사 소유로 드러났고, 저지에 세운 익명의 회사 소유가 8%가량 되는 것으로 나타났죠.

런던 부동산 시장으로 흘러들어온 검은 돈은 런던을 부정부패의 허브로 만들면서 런던의 이미지를 퇴색시키는 한편 런던의 부동산 가격의 비정상적인 상승을 조장한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습니다. 런던 부동산에 들어오는 검은 돈을 활용해 수익을 보려는 런던 부동산 개발업자들이 일반 영국인들이 살 수 있을 정도의 저렴한 주택을 건설해 공급하는 것보다는 검은돈의 구미에 맞는 최고급 최신식의 아파트, 고급 주택 등을 지어 비싸게 팔아 부동산 가격을 띄운다는 것이죠. 검은돈 소유자들은 런던 주택이 비싸면 비쌀수록 한 번의 거래로 더 많은 돈을 깨끗한 돈으로 세탁할 수 있어 선호합니다.

일간 인디펜던트에 따르면 부동산 거래에 간접적으로 연관된 영국 금융기관, 로펌 등과 마찬가지로 부동산 에이전트들은 부동산 거래에 있어 돈의 출처가 의심스러운 경우 국가범죄감시기구인 NCA에 보고하도록 돼 있습니다. 그런데 의심스러운 거래건 전체에 대해 이들이 보고한 건은 0.05%에 그치는 것으로 드러났죠.

결국 금융기관, 부동산 개발업자 및 에이전트, 영국령 조세회피처 등에 페이퍼컴퍼니를 세우고 탈세와 자금 이동 등에 활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로펌 등이 합심해 런던 부동산이 글로벌 검은돈의 세탁지가 되는데 기여한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국제범죄조직과 부패 관료들의 돈세탁 수법은 갈수록 다양해지고 정교화되는 가운데 영국의 정치경제 아젠다가 브렉시트(영국의 유럽연합 탈퇴)에 집중돼 있으면서 글로벌 조직범죄와 불법적인 자금 유통을 대응하는데 있어 영국 부패감시 당국의 의지와 역량이 따라가지 못한다는 지적도 거세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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