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월드컵
X

“건강한 국민만이 조국 되찾는다”...유일한 ‘구국 신념’이 일군 신화[유한양행 100년의 약속]①

이 기사 AI가 핵심만 딱!
애니메이션 이미지
유진희 기자I 2026.06.22 13:00:03

9세 유학생에서 특수공작원까지...단순한 자본가 넘어선 ‘실천적 독립운동가’ 발자취
꺾여도 다시 자라는 버드나무 로고에 담긴 진정성, 시장 흔든 ‘정직과 계몽’의 마케팅

[이데일리 유진희 기자] “건강한 국민만이 잃었던 조국을 되찾을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한 세기 전인 1926년, 나라를 잃고 유랑하던 암울한 식민지 조선 땅에 울려 퍼진 한 청년 사업가의 일성은 자본의 논리를 넘어선 일종의 ‘독립 선언’이었다. 미국에서 식품회사를 세워 이미 거대한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던 고(故) 유일한 박사. 그가 보장된 안락한 삶을 뒤로하고 굳이 척박하고 메마른 고국으로 돌아와 제약회사를 세웠을 때, 세상은 그를 무모한 이상주의자로 여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가 심은 버드나무 한 그루는 100년이 지난 오늘날, 대한민국 제약·바이오 산업을 지탱하는 가장 거대한 거목으로 성장했다.

올해 창립 100주년을 맞이한 유한양행(000100)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핵심 가치는 창업자 유일한 박사의 생애 그 자체와 맞닿아 있다. 유한양행의 출범은 단순히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의 탄생이 아니라, 도탄에 빠진 민족의 보건 주권을 확립하려는 치열한 구국 운동의 연장선이었다.

1919년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 당시 유일한 박사(오른쪽 첫번째)의 모습. (사진=유한양행)
소년병학교서 냅코 작전까지...독립운동 혈통 잇다

유일한 박사의 생애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실천’이다. 그는 아홉 살 되던 1904년, 순회공사 박장현을 따라 머나먼 미국 네브래스카주로 건너가 침례교 신자였던 두 자매의 집에 맡겨지며 고단한 유학 생활을 시작했다. 어린 나이에 타향에서 겪은 수많은 고초는 그를 꺾지 못했고, 오히려 조국의 현실에 대한 통렬한 책임감을 심어주었다. 14세가 되던 해에는 미국 내 독립운동의 대부였던 박용만 선생이 설립한 한인소년병학교에 입학해 혹독한 군사 훈련을 받으며 민족의 자강 의지를 온몸으로 체득했다.

그의 민족 자부심이 얼마나 확고했는지는 16세 고등학교 시절, 본명인 ‘유일형’ 대신 한국인(韓)이라는 정체성을 명확히 드러내기 위해 스스로 ‘유일한’으로 개명한 일화에서도 극명히 드러난다. 타향에서 보낸 청년기 동안 그는 고통받는 동포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뇌했다. 이러한 고민의 결과물은 1919년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자유대회’에서 마침내 구체적인 비전으로 선포된다. 그는 대회장에 서서 “우리 민족이 독립하려면 스스로 설 수 있는 경제적 힘과 교육, 그리고 무엇보다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운 건강한 몸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주권을 빼앗긴 민족이 자립하기 위해서는 보건과 경제적 자강이 선행돼야 한다는 심오한 통찰이었다.

이러한 애국심은 말과 글에만 머물지 않았다. 1940년대 미육군전략처(OSS)가 주도한 비밀 첩보 작전인 ‘냅코 작전’(NAPKO PROJECT)에 유일한 박사가 특수 요원으로 참여한 게 대표적이다. 그가 단순한 자본가나 후원자가 아닌 목숨을 걸고 전선에 뛰어든 실천적 독립운동가였음을 증명한다.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적지 투입 작전을 수락했던 그의 단단한 정신력은 훗날 유한양행을 이끄는 가장 강력한 경영 철학의 기틀이 됐다.

사명인 ‘유한양행’에도 이러한 비전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자신의 성인 ‘버들 유(柳)’와 조국 ‘한국(韓)’을 결합해 ‘한국인 유일한이 세운 서양 물건(의약품)을 파는 가게’라는 직관적인 의미를 담았다. 특히 당시로서는 파격적이었던 ‘양행’(洋行)이라는 표현을 선택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양행은 본래 ‘서양으로 향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이는 식민지 국가의 작은 시장에 안주하지 않고, 세계의 우수한 의약품 기술을 도입하는 것을 넘어 향후 우리의 제품을 전 세계로 수출하겠다는 원대한 글로벌 포부를 창립 당시부터 천명한 것이다.

유한양행 창립 당시부터 1929년까지 사옥으로 사용했던 서울 종로의 덕원빌딩. (사진=유한양행)
서재필 박사가 건넨 버드나무 지혜...‘신용과 계몽’으로 시장 뒤흔들다

유한양행의 상징인 ‘버들표’ 로고는 독립운동가 서재필 박사와 깊은 인연에서 탄생했다. 필라델피아 한인자유대회 의장이었던 서재필 박사는 젊은 유일한의 혜안을 높이 평가하며 든든한 멘토가 돼주었다. 유일한 박사가 1926년 고국으로 돌아가 제약회사를 세우겠다는 계획을 밝히자, 서재필 박사는 조각가였던 자신의 딸에게 특별히 부탁해 버드나무 모양의 목각품을 증표로 선물했다. “버드나무는 아무리 꺾여도 다시 자라나며, 아무리 메마른 땅에서도 깊게 뿌리를 내리는 끈질긴 생명력을 가졌다. 이 버드나무처럼 조선 민족에게 시원한 그늘을 안겨주고 희망을 주는 기업이 돼라”는 준엄한 당부였다. 유 박사는 이 버들표 정신을 기업의 영혼으로 삼고 서울 종로에서 민족 기업의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조선의 보건 환경은 참혹했다. 전염병과 영양부족이 만연했으나, 일제 제약 자본이 독점한 의약품 시장의 폭리로 인해 민중들은 제대로 된 치료제 한번 써보지 못하고 목숨을 잃기 일쑤였다. 유일한 박사는 “글을 가르치는 교육도 중요하지만, 당장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는 보건이 가장 시급한 과제”라며 의약품의 국산화와 근대화에 사활을 걸었다.

유한양행의 마케팅과 소통 방식은 당대 자본주의 시장의 관행을 뒤흔든 혁신 그 자체였다. 창립 당시 일간지에 게재된 유한양행의 개업 광고는 나열식 제품 설명과 만병통치약식 과장 광고가 판치던 시대에 신선한 파격을 선사했다. 제품의 효능을 길게 늘어놓는 대신, 서재필 박사가 선물한 ‘버들표’ 로고를 전면에 거대하게 배치하는 시각적 브랜딩을 시도한 것이다. 이는 단기적인 이윤 추구보다 ‘민족의 안식처’라는 기업의 진정성을 대중의 뇌리에 각인시키기 위한 고도의 전략이었다.

특히 유한양행은 당시 지극히 불투명했던 의약품 유통 관행을 정면으로 돌파했다. 광고에 의약품의 정확한 성분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모조품과 폭리를 방지하기 위해 ‘정찰제’를 전격 도입했다. 불신이 가득했던 시장에서 유한양행의 버들표는 단숨에 ‘정직’과 ‘신뢰’의 보증수표로 자리 잡았다.

1930년대에 이르러 유한양행의 행보는 단순한 기업의 판촉을 넘어 공중보건을 선도하는 ‘계몽적 학술 마케팅’으로 진화한다. 결핵치료제 출시 전, 유한양행은 전국의 소외 지역을 순회하며 결핵 예방 강연회를 개최해 공익적 정보를 보급했다. 자양강장제인 ‘네오톤 토닉’ 광고에는 약품의 의과학적 작용 원리를 상세한 일러스트와 함께 수록해 대중의 보건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가장 상징적인 것은 ‘의사는 당신의 친우(親友)’라는 광고 시리즈였다. 약을 더 많이 팔기 위해 오남용을 조장하는 대신, 반드시 전문가인 의사의 정확한 진단을 거친 후 안전하게 복용하라고 권고한 것이다. 기업의 이익보다 국민의 건강권과 생명권을 최우선 가치로 두었던 유한양행만의 독창적인 경영 철학은 이렇게 완성됐다.

유일한 박사가 남긴 유언장. (사진=유한양행)
수입 넘어 자립으로...100년 기을 지탱하는 지속 가능한 근간

설립 초기 유한양행은 선진 미국산 의약품을 수입·판매하며 신뢰도를 쌓았으나, 유일한 박사의 시선은 언제나 ‘기술 자립’을 향해 있었다. 그는 1936년, 당시 중국 상해에 체류 중이던 오스트리아 비엔나 출신의 세계적인 화학자 발레트 박사를 국내 자체 공장의 기술책임자로 전격 초빙하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해외 석학의 선진 기술력을 이식받은 유한양행은 경기 소사공장에서 미국이나 일본 제품을 능가하는 고품질의 의약품을 자체 생산해 내기 시작했다. 일본 거대 자본이 독점하고 있던 식민지 의약품 시장에서 우리 민족의 기술력과 품질로 전면 승부를 걸어 승리한, 한국 제약 산업 역사상 가장 기념비적인 성과였다.

100년 전 종로의 작은 사무실에서 버들표 로고 하나로 진정성을 선포했던 유한양행의 소통 철학은 현대에 이르러서도 광고 모델 기용 전략 등으로 고스란히 이어지고 있다. 대중적 인지도나 자극적인 이슈에 기댄 스타 마케팅 대신, 축구선수 손흥민 등 모델이 지닌 성실함과 헌신적인 이미지가 기업이 쌓아온 신뢰의 자산과 부합하는지를 철저히 따진다.

“가장 좋은 상품을 만들어 국가와 동포에게 도움을 주자”는 유한양행의 창립 정신은 결코 과거의 유산으로 박제되지 않았다. 이윤을 공동체와 나누고, 전문경영인 체제를 확립해 사후 5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흔들림 없는 성장을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이 상생의 뿌리가 단단했기 때문이다. 구국의 신념으로 세운 민족 자강의 심장은 이제 다음 세기의 인류를 향해 고동치고 있다.

이 기사 AI가 핵심만 딱!
애니메이션 이미지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