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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희 미술평론가] ‘절규’(1893)는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다. 다리 난간 위에서 두 손으로 귀를 막고 입을 벌린 채 비명을 지르는, 아니 비명 그 자체가 돼버린 인물. 그는 이제 미술의 영역을 넘어 현대인의 실존적 불안을 가리키는 하나의 보편적 기호가 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그림에 끌리는 것은 언어로는 온전히 표현하기 어려운 ‘밑도 끝도 없는 불안’의 감정을 이토록 단순하고 직접적인 형상으로 포착해냈기 때문일 터다. 에드바르 뭉크(1863∼1944). 어떤 인생을 살았기에 그의 그림 속 인물은 이처럼 비명을 지르고 달아나는 것인가.
노르웨이 북부 뢰텐에서 태어난 뭉크의 어린 시절 원체험은 가까운 이들의 연이은 죽음이었다. 다섯 살에 어머니를 폐결핵으로 잃었고, 어머니를 대신해 동생들을 돌보던 한 살 위 누나 소피마저 같은 병으로 죽었다. 열네 살의 소년이 침대 옆에서 누이의 마지막 숨을 지켜봤던 기억은 이후 뭉크가 ‘병든 아이’를 주제로 수십 년간 변주를 거듭하는 원형적 경험이다.
아버지는 군의관이었으나 넉넉지 못한 형편이었고, 아내와 딸의 연이은 죽음으로 정신적 균형을 잃자 차츰 광적으로 종교에 매달렸다. 어린 자녀들에게 공포소설을 읽어 주며 종교적 두려움을 강요하고, 자녀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엄마가 하늘에서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해라” “엄마가 보시면 얼마나 슬퍼하겠느냐”라며 끊임없이 죽은 아내를 소환했다. 또한 밤마다 중얼중얼 기도하는 아버지의 목소리가 온 집안에 짙게 깔렸다고 한다. 이 와중에 여동생 라우라는 정신질환을 앓게 돼 병원에 입원까지 했다. 훗날 뭉크 자신이 말했듯이 그는 “일생을 죽음과 함께 살았다.”
‘밑도 끝도 없는 불안’ 끝없이 그렸던 까닭
가족에게서 안식을 찾지 못한 뭉크는 사랑에서 그것을 구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연애사를 살펴보면 한숨이 나올 정도로 반복적인 좌절을 겪는다. 스물두 살의 여름, 남부 작은 바닷가 마을 오스고르스트란 해변에서 네 살 연상의 유부녀 밀리 타울로우와 비밀스러운 사랑에 빠진 것이 첫 번째 경험이었다. 서른 즈음 이주한 독일 베를린 시절에는 노르웨이 출신의 음악도 다그니 유엘에게 끌렸으나 유엘은 폴란드 작가 프시비셰프스키와 결혼한 뒤 서른넷의 나이에 괴한이 쏜 총에 피살되고 만다.
가장 깊이 얽힌 여인은 부유한 포도주 상인의 딸 툴라 라르센이었는데, 서른다섯 살인 1898년부터 시작된 이 관계에서 라르센은 끈질기게 결혼을 원했으나 뭉크는 애매한 답변을 하며 내내 결정을 피했다. 급기야 뭉크는 라르센으로부터 도망을 다녔다. 하지만 유럽 어느 도시로 달아나도 라르센은 뒤쫓아왔고 거부하면서도 외면하지 못하는 줄다리기가 계속됐다. 결국 머리끝까지 화가 난 라르센은 뭉크에게 총구를 겨눴다. 1902년 라르센과의 마지막 만남은 권총사고로 끝났다. 뭉크는 왼손에 총을 맞고 가운데 손가락 일부를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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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크 자신은 이 그림 ‘삶의 춤’에 대해 이렇게 적어두기도 했다. “나는 첫사랑과 함께 춤을 추고 있다. 기억 속의 그녀는 미소 짓는 금발 여성이다. 반대편에 검은 옷을 입은 그녀가 슬픈 얼굴로 바라보고 있다.” 흰옷에서 붉은 옷으로 다시 검은 옷으로 이행하는 이 삼단의 순환은 사랑의 씨앗에서 꽃피움과 시듦까지를 압축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기괴한 춤의 실질적 내용이 고독이라는 것은 뭉크의 사랑 경험 전체에 대한 고백처럼 느껴지게 한다.
1908년 뭉크는 알코올중독과 신경쇠약이 극에 달해 덴마크 코펜하겐의 야콥손 박사 클리닉에 입원했다. 그렇게 한 화가의 인생이 저무는가 싶었지만 뭉크는 약 여덟 달간의 치료를 받고선 건강을 회복했고 정신적으로도 안정을 찾았다. 퇴원 후 노르웨이로 돌아온 뭉크는 1916년 오슬로 외곽의 에클리 농장을 구입해 정착했으니, 쉰셋의 나이에 이르러 비로소 한곳에 뿌리를 내린 것이다.
5만 5000평의 너른 부지에 여러 채의 야외 작업실을 갖춘 에클리에서 뭉크는 이후 끝내 결혼하지 않고 사실상 은둔생활을 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가 진정으로 교류한 상대라고는 캔버스와 강아지 핍스뿐이었다. 가끔 막내 여동생이 그를 들여다봤을 뿐이다.
이 고독한 시기의 작품들이 이전보다 훨씬 밝고 풍요롭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다. 그 변화를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작품이 오슬로대 강당에 걸기 위해 그린 ‘태양’(1911)이다. 폭 7.8m, 높이 4.4m에 달하는 이 거대한 그림에서 태양은 노르웨이 남부 크라게뢰 해안의 바위 지형 위로 솟아올라 노랑·주황과 붉은 광선을 사방으로 뿜어내고, 그 빛은 캔버스의 가장자리를 넘어 양옆의 다른 패널들에까지 뻗어나간다. 두꺼운 물감층과 강렬하고 밝은 색채로 이뤄진 이 화면은, 수평선 아래의 바다와 바위를 푸른색과 보랏빛으로 처리해 태양의 압도적인 밝음과 극적인 대비를 이룬다. 이전까지 죽음과 불안과 질투에 사로잡혀 살던 화가가 생명의 근원 자체를 직시하게 된 것은 대단한 전환이 아닐 수 없다. 타인과의 관계가 주는 긴장과 고통에서 벗어났을 때 그는 비로소 세계의 단순한 아름다움 앞에 눈을 열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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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하나의 놀라운 사실이 있다. 에클리 시절 뭉크는 너무도 매력적인 사진들을 남겼다. 기술 혁신에 관심이 컸던 뭉크는 녹음기, 전화기, 라디오 등을 구입했고, 그중 가장 애정을 가지고 활용했던 것이 카메라였다. 1902년 코닥 불스아이 2호 카메라를 구입한 뭉크는 미술사에서 가장 이른 ‘셀카’의 주인공이 됐는데, 사후 남겨진 사진 183점과 네거티브 30점 가운데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1930년경 에클리의 겨울 작업실 앞에서 찍은 한 장의 셀카다. 눈을 감은 옆모습의 뭉크가 카메라를 팔길이만큼 앞으로 내밀고 셔터를 누른 이 사진은, 오늘날 우리가 스마트폰을 들어 올려 자기 얼굴을 찍는 행위와 닮아있는 것이다. 뭉크가 남긴 사진들은 그의 생활 전반을 알 수 있을 정도로 다채롭고 또 많다. 과연 뭉크는 자신을 사진으로 찍어 남기는 행위를 통해 살아 있는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던 것일까. 홀로 있었지만 슬프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었을까.
1944년 1월 뭉크는 에클리의 집에서 여든한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바로 얼마 전인 12월 인근 필립스타 탄약고 폭발이 오슬로를 뒤흔들었을 때 그는 추운 밤 부서진 창문 너머의 화염을 보고 수채화를 그렸는데, 추위에 노출돼 걸린 호흡기 질환이 한 달 뒤 그를 데려갔으니 마지막 순간까지 뭉크는 그림을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생전에 뭉크는 자신의 모든 작품(회화 1100점, 소묘 4500점, 판화 1만 8000점)을 오슬로 시에 유증했다. 이 유산은 오늘날 뭉크미술관의 토대가 됐고 단일 작가의 것으로는 가장 규모가 큰 미술관 중 하나가 됐다. 청년 시절에는 ‘절규’의 고통을 말했지만, 말년에는 셀카를 찍으며 강아지와 함께 고요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자신의 미술관을 예비했다. 순탄한 삶은 아니었으나 끝내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고, 어쩌면 그 자신만의 방식으로는 더없이 충만한 삶이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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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생. 대학을 다니던 20대 어느 겨울, 유럽행 비행기에 오른 것이 인생에 미술을 들인 결정적 계기가 됐다. 어느 미술관에서 마주친 렘브란트의 ‘어머니 초상’이란 작품이 발을 붙들었다. 뭔가 꿈틀거리는 게 올라왔다. 세상을 감동시킨 수많은 작품이 품은 이야기를 가지고 싶다는 열망과 함께였다. 이화여대 독문학과를 졸업한 뒤 동대학원 미술사학과에 진학해 본격적으로 미술의 역사, 미술의 말을 공부했다. 이후 ‘공간’ 지 미술기자로 출발해 대전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아트센터 화이트블럭 학예실장, 청주시립미술관 학예실장, 수원시립미술관 학예과장 등을 거쳤고, 지금은 이화여대·추계예대 등에서 미술이론을 강의하며 오래전 렘브란트의 감동을 넓혀가고 있다. 번역서로 ‘그림자의 짧은 역사’(2006), ‘포토몽타주’(2003), ‘바디스케이프’(1999)가 있으며 저서로는 ‘불편한 시선: 여성의 눈으로 파헤치는 그림 속 불편한 진실’(2022), ‘꿈꾸는 방: 여성과 공간의 미술사’(2023)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