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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오전 9시25분 서울 동대문구 1호선 동대문역 주변 동대문성곽공원 앞. 45인승 고속버스 3대가 주차해 있는 길가 옆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였다. 기자에게 말을 끝내자마자 김학규(52)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기념사업회) 사무국장의 전화기가 다시 울렸다. 박종철 열사의 공식 추모식은 오전 11시. 하지만 31주기 추모식에 대한 관심은 이미 달아오르는 듯했다. 기념사회업회는 이날 서울에서 박종철 열사의 묘가 있는 경기도 남양주시의 마석 모란공원까지 추모객의 이동 편의를 위해 버스 3대를 대절했다.
김 국장의 조언에 따라 첫 번째 버스에 몸을 실었다.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유가협)관계자들이 주로 타고 있다는 버스였다. 그런데 버스 맨 앞 자리에서 만난 이는 의외로 일반 시민이었다. 경기도 고양시에서 부모님을 도와 자영업을 하고 있다는 안연옥(36, 여)씨는 “역사와 민주화 운동에 관심이 많은데 최근 영화 ‘1987’을 2번 봤다”며 “추모식에는 처음 왔다. 현장에서 박종철 열사의 넋을 기리고 싶어 참여했다”고 말했다.
버스는 1시간여를 달려 10시30분께 모란공원 입구에 진입했다. 이미 입구 주차장은 승용차와 추모객, 이들은 돕는 자원봉사단체(모란공원 사람들) 사람들로 부적거리기 시작했다. 경찰관 3명이 나와 교통정리를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현장에서 만난 이명선(45) 남양주 경찰서 교통과 경위는 “보통 행사가 있으면 현장에 나오는데 오늘은 차가 너무 많다”며 “이전 같으면 입구주차장만 차고 말았을텐테 오늘은 안쪽 주차장으로 주차를 유도하고 있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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붐비는 인파 속에서 묘소를 정면으로 바라봤을 때 왼쪽에 박종철 열사의 친누나 박은숙씨의 모습이 포착됐다. 박종철 열사 친형인 박종부씨 역시 묘소 오른쪽에 있었다. 이날 추모식에는 박종철 열사의 가족과 함께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축소 은폐를 폭로한 이부영 전 의원, 이한열 열사의 어머니 배은심씨, 김세균 서울대 명예교수, 박종철 열사의 모교인 서울대와 부산 혜광고 재학생 등이 참석했다. 김학규 사무국장은 이날 모란공원 추모객을 200여 명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박종철 열사의 아버지 박정기씨는 지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어 참석하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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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종일관 무거운 분위기만이 추도식을 지배했던 것은 아니다. 장남수 유가협 회장은 “매년 (추모사로) 박종철 열사에게 할 말이 없었는데 오늘은 할 말이 있다”며 “우리가 해냈다. 우리 민주 시민이 박근혜 대통령을 감옥으로 보냈다. 박종철 열사 앞에서 이 말을 꼭 하고 싶었다”고 전했다. 이러자 추모객 사이에서 ‘와’라며 환호소리와 박수가 터져 나왔다.
특히 박종철 열사의 고등학교 동창이자 혜광고 28기 동기회 회장인 김상준씨는 “이 자리에는 추도사를 하려고 하니까 카메라가 너무 많다. 니가 너무 많이 떴다”며 무거웠던 분위기를 부드럽게 했다. 김 씨는 그러면서 “이번에 영화를 친구들하고 단체관람을 했는데 다른 줄거리는 하나도 안 보이고 니가 고문당하는 모습에 친구들과 같이 많이 울었다..잘 있거라”며 고인을 회생했다.
박종철 열사의 친형 박종규 씨는 아버지가 자리를 함께 못 한 것을 아쉬워했다. 박씨는 “제가 업고서라도 이 자리에 모시고 싶었던 분이 있는데 그렇지 못했다. 우리 아버지”라며 “아마도 아버지가 이 자리에 계신다면 이리 말씀하셨을 거 같다. ‘30년 모질게 싸우다 보니까 이제 막내한테 덜 미안해 질라나’”라며 민주 운동에 헌신한 이들의 이름을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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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씨에게 ‘추운데 장갑을 끼지 않은 이유가 있느냐’고 묻자 “특별한 이유 없다. 올해 추모식도 특별하지 않다”며 “매년 같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여러분 열심히 싸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조금 더 하십시오’ 라고 종철이가 말했을 거 같다. 그런 종철의 목소리를 너무 듣고 싶었다”고 말했다.
추모식에서는 31년 만에 처음으로 박종철 열사의 부산 혜광고 후배들도 찾아와 의미를 더했다. 혜광고 3학년인 손석호(20)학생회 부회장은 “많은 분이 시간이 지났지만 역사를 기억하고 찾아와주시고 저를 포함해 많은 분이 영화를 통해 지난 선배의 역사를 많이 알게 돼 선배에게 기쁨을 드린 거 같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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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의 요구가 클 때 역사의 현장이 계속 변질되고 있는 대공분실을 더는 놔둘 수 없다”며 “대공분실에서 박종철이 죽었는데 3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경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박종철을 시민의 품으로 박종철을 구출하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남영동 대공분실 4층에는 박종철 기념관실이 있다. 하지만 그 맞은편에는 ‘경찰 인권사료관’이 함께 있어 ‘어색하다’는 평가가 많다. 또한 15개의 조사실이 있는 5층은 박종철 열사가 고문을 받다 죽은 509호실을 제외하면 나머지 조사실은 예전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가령 김근태 전 민주당 상임고문이 1985년 당시 민청련 의장으로 전기고문과 물고문을 당한 515호실은 2000년대 초반 리모델링을 하면서 당시 모습이 사라졌다. 건물 입구에 있으면서 탱크 소리를 연상케 하는 굉음을 내면서 열렸던 육중한 2층 철문 역시 건물 바깥쪽 철문이 내부가 들여다보이는 문으로 바뀌었다.
박종철 열사의 서울대 언어학과 후배인 이현주(53, 여)씨는 “매년 추모식을 마치고 돌아갈 때는 굉장히 마음이 아프다. 경찰들 손에 다시 박종철 선배를 또 넘겨주고 가는듯한 느낌이었다”며 “올해는 많은 사람이 찾아주셨기 때문에 그 관심을 바탕으로 빨리 박종철 선배가 편안하게 쉴 수 있도록 남영동 대공분실을 찾아와야겠다는 마음을 어느때보다 많이 했다”고 말했다. 기념사업회는 현재 청와대 홈페이지에서 ‘남영동 대공분실을 시민의 품으로’라는 국민청원 운동을 벌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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