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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윤 미술평론가] “역사의 주체는 민중이다.”
[정하윤 미술평론가] 어린 시절 유난히 고집이 센 한 소녀가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존경하던 아버지를 아홉 살에 갑작스레 잃고서야 소녀는 체념이란 단어를 알게 됐다. 깊은 상실의 늪 속에서 소녀가 찾아낸 길은 남들과 달랐다. 종이에 지나간 흔적을 새기며 자신만의 세계를 만드는 일이었다. 그 세계는 흔들리고 불안한 순간에도 걸음을 멈추지 않게 하는 힘이 돼줬다. 훗날 그 길은 그를 한국미술에서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한 화가로 이끌었다. 바로 심경자(81)다.
1944년 경남 창녕에서 태어난 심경자의 예술 여정은 서울 수도사범여자대학(지금의 세종대)에서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1962년부터 1968년까지 학부와 대학원에서 이당 김은호(1892∼1979), 운보 김기창(1913∼2001), 소정 변관식(1899∼1976) 등 거장들을 사사하며 전통 회화의 기초를 닦았다. 특히 김기창과의 만남은 그에게 새로운 길을 터 줬다. 이를테면 망친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심경자를 본 스승이 새 종이를 덧대 그림을 이어준 일이 있었다. 그 순간 제자는 훗날 자신의 대표 작업이 될 콜라주 방식을 배웠다. 아니, 단순한 기법이 아니라 인생의 태도를 배웠는지도 모른다. 인생길이 잠시 어긋날지라도 계속 걸어가면 마침내 아름답게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을.
김기창의 권유로 시작한 탁본 작업은 또 다른 전환점이었다. 종이 아래에 사물을 두고 그 위로 물감을 묻힌 뒤 문질러 문양을 떠내는 방식이었다. 붓 대신 손으로 얻는 흔적은 그에게 전혀 다른 세계를 열어줬고, 문지르는 사이에 피어나는 우연의 효과는 신선하게 다가왔다. 하지만 탁본 작업은 쉽지 않았다. 전국의 절과 궁, 깊은 숲을 찾아다니며 탁본 거리를 구해야 했다. 무거운 짐과 재료를 홀로 짊어진 채 구불구불한 산길을 걸었고, 바람이 잦아든 맑고 건조한 날을 골라 기와나 나무 나이테 등을 끊임없이 문질렀다. 매해 여름은 땡볕 아래 벌레와 전쟁하며 보냈다. 탁본을 뜬 문양을 큰 종이에 붙이기 위한 풀도 직접 만들었다. 불순물을 걷어내고 몇 달을 달여야 비로소 완성되는 까다로운 과정이었다. 마치 약재를 고이 달이듯 정성과 마음을 쏟은 시간들은 곧 작품의 질감과 깊이로 스며들었다. 오래된 사물의 표면을 종이에 옮기는 동안 그 안에 깃든 세월의 흔적은 풍부한 결로 되살아났다.
그렇게 탄생한 대표작 중 하나가 ‘별전’(1973)이다. 심경자는 별전(엽전 모양 장식품 혹은 주화)과 동경(거울) 뒷면, 엽전, 기와, 떡살, 나무 나이테 등 다양한 사물의 문양을 한지에 탁본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문양들을 오려내 큰 화면에 배치해 붙였다. 한국 전통 속에서 이뤄진 이 작업은 동시에 콜라주적 방식을 품고 있었다. 엄격한 동양화의 틀을 지키면서도 그 경계를 넘어서는 새로운 시도였다.
일찍부터 화단서 눈길…시대 화두 담은 ‘독창성’
심경자의 독창적인 작업은 일찍부터 화단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1971년 ‘제20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문공부장관상을 받으며 두각을 나타냈고 이후 4년을 연이어 특선, 국전 추천작가로 선정됐다. 그의 작품이 주목받은 이유는 단지 아름다움만이 아니었다. 국전에서 주목받은 작품들은 뛰어난 기량과 열정을 넘어 시대의 화두를 담고 있어야 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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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심경자는 더 넓은 세계에서 자신을 시험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1976년 개인전을 마치고 프랑스로 떠나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간절한 만큼 성공하지 못하면 예술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다행히 전시는 성공적이었고, 그는 남편과 아이들을 뒤로한 채 파리로 향했다.
당시 파리에는 이응노·김창열·남관·이성자 등 한국의 여러 화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다. 심경자는 김창열의 소개로 폴 파케티 화랑을 알게 됐다. 미국 추상미술가 잭슨 폴록을 프랑스에 소개하고, 프랑스 추상미술을 선도했으며, 이응노를 알아보고 첫 개인전(1962)을 열게 한 당대 최고의 갤러리였다. 파케티 관장은 심경자의 작품을 한참 동안 바라본 뒤 감탄하며 전시를 제안했다. 신인에게 쉽게 주어지지 않는 기회였다. 그 덕분에 심경자는 자신이 가는 길에 확신을 얻었다. 1978년 파리의 첫 개인전은 예정된 기간을 훌쩍 넘겨 연장해야 할 만큼 호응을 받았다.
파리화단 성공적 데뷔에도 2년 만에 끝난 유학
그러나 1979년 심경자는 도불한 지 2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아내이자 어머니로서의 삶을 살아내기 위한 결정이었다. 육아와 가사는 당연히 여성의 몫으로 여겨지던 시절, 여성 화가가 홀로 타국에서 커리어를 이어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갈등과 고민은 결국 또 다른 작업을 열었다. 바로 후반기 대표 연작 ‘가르마’다.
‘가르마’ 작업은 이후 50년 넘게 그가 몰두한 주제가 됐다. 심경자는 “‘가르마’에는 우리 어머니, 할머니의 상이 담겨 있고 또 내가 살아온 길과 살아갈 길이 담겨 있다”고 설명한다. 단지 곱게 빗은 머리 가운데 생긴 하얀 선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인생길을 형상화한 선이라는 뜻이다. 나아가 ‘가르마’의 영문제목을 업(業)을 뜻하는 ‘Karma’(카르마)로 표기했는데,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행위가 결국 하나의 결과로 이어진다는 의미를 보탠 것이다. 이중적인 제목은 한 사람의 삶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어지는 긴 여정이라고 일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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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인 것은 그에게도 우리에게도 서로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홀로 걷는 듯해도 돌아보면 언제나 함께 걷는 이들이 있다. 심경자의 화면에 조화롭게 놓인 탁본의 문양들은 고된 삶 속에서도 서로 위로하며 어우러져 살아가는 우리 인생길을 닮아 있다.
심경자는 삶이 흔들릴 때마다 그림이 자신을 붙잡아줬다고 고백한다. 남편을 잃었을 때도, 병으로 지쳐 있을 때도 그림은 늘 곁에서 위로가 돼줬다. 이제 그의 그림은 보는 이의 마음을 어루만진다. 지난한 생의 여정 속에 새긴 선과 문양은 흔들리고 불안한 시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한 걸음 내디딜 힘과 용기를 건넨다. 그림이 주는 위로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