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 개국공신교서(사진=문화재청) |
|
[이데일리 이정현 기자]태조 이성계가 개국공신 이제에게 내린 공신교서 ‘이제 개국공신교서’가 국보로 지정됐다. 이밖에 ‘이정 필 삼청첩’ 등 조선 시대 서화가의 작품과‘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를 비롯한 매장환수문화재 등 총 13건을 보물로 지정됐다.
국보 324호인 이제 개국공신교서는 1392년(태조 1년) 태조 이성계가 조선 개국 일등공신 이제(?~1398)에게 내린 공신교서다. 교서는 국왕이 직접 당사자에게 내린 문서로서, 공신도감이 국왕의 명에 의해 신하들에게 발급한 녹권에 비해 위상이 높다. 이제는 태조 계비 신덕왕후의 셋째 딸인 경순궁주와 혼인한 뒤 이성계를 추대해 조선을 개국하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조선 초기의 개국공신녹권으로는 국보 제232호 ‘이화 개국공신녹권’을 비롯해 개국원종공신녹권 7점이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개국공신교서’로는 ‘이제 개국공신교서’가 처음으로 국보로 지정되었다.
교서의 끝부분에는 발급 일자와 ‘고려국왕지인’이라는 어보가 찍혀 있다. 이 어보는 1370년(공민왕 19년) 명나라에서 내려준 고려왕의 어보로서 조선 개국 시점까지도 고려 인장을 계속 사용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제 개국공신교서는 조선 최초로 발급된 공신교서이자 현재 실물이 공개되어 전하는 유일한 공신교서라는 점에서 조선 시대 제도사 및 법제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자료다.
| 김정희 필 서원교필결후(사진=문화재청) |
|
보물 제1982호 ‘김정희 필 서원교필결후’는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조선 후기 서예가 이광사(1705~1777)가 쓴 ‘서결ㆍ전편’의 자서에 해당하는 부분에 대해 비판한 글을 행서(약간 흘려 쓴 한자 서체)로 쓴 것이다. 이광사의 서예 이론을 전반적으로 검토하면서 글씨를 연마하는 데 있어 금석문 고증의 필요성을 강조한 내용이다. 이는 우리나라 서예이론 체계를 연구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 준다. ‘서원교필결후’는 김정희 서예이론의 핵심을 담고 있는 글이자 조형성이 뛰어난 추사체의 면모가 잘 드러나 있어 조선 말기 서예사 연구에 있어 중요한 작품이다.
| 김정희 필 난맹첩(사진=문화재청) |
|
보물 제1983호 ‘김정희 필 난맹첩’은 묵란화 16점과 글씨 7점을 수록한 서화첩으로, 김정희의 전담 장황사(표구장인) 유명훈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제작한 것이다. 글씨 뿐 아니라 사군자에도 능했던 김정희는 관련 작품을 여럿 남겼지만 ‘난맹첩’처럼 묵란만 모은 사례는 이 작품이 유일하다.
이 서화첩은 난의 형상을 서예적 필법으로 표현한 한편 조형성을 염두에 둔 경물 배치와 인장 등을 한 화면에 어울리게 구현한 김정희의 감각이 유감없이 발휘된 대표작이다. 아울러 후대 화가들의 작품 활동에 큰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써 미술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 이정 필 삼청첩(사진=문화재청) |
|
보물 제1984호 ‘이정 필 삼청첩’은 조선 시대 묵죽화를 대표하는 인물인 탄은 이정(1554~1626)의 작품으로 그가 중년에 이른 시점인 1594년(선조 27년) 12월 12일 충남 공주에서 그린 것이다. 매화, 난초, 대나무를 감색으로 물들인 비단 위에 금니로 그렸으며 식물의 생태와 형상을 매우 우아하고 정교한 필치로 묘사했다. 조선 시대 사군자화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작품이자 조선 시대 최고의 묵죽화가 이정의 수준 높은 필력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예술적 가치가 높다.
| 이징 필 산수화조도첩(사진=문화재청) |
|
보물 제1985호 ‘이징 필 산수화조도첩’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화가 허주 이징(1581~미상)의 그림을 모은 첩이다. 이식(1584~1647), 이명한(1595~1645) 등 당대 유명 문인들의 시문 37점이 함께 수록되어 있다. 이 서화첩은 이징의 62세 무렵인 1652년(인조 20년)경 제작된 것으로, 당시 이징은 도화서 교수로 활약하며 예술적 기량이 최고조에 이른 시기였다.
이 서화첩은 이징이 화조 영모 분야를 비롯해 산수에서도 17세기 회화를 선도한 역량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기준작으로서 의미가 크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시서화 합벽첩이자 조선 중기 산수화조화 중 드물게 작가와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작품이어서 한국회화사 연구의 중요한 편년작으로 가치가 높다.
보물 제1986호 ‘심사정 필 촉잔도권’은 조선 후기 대표적인 문인화가 현재 심사정(1707~1769)이 죽기 1년 전인 1768년 8월에 이백의 시 ‘촉도난’을 주제로 하여 촉나라로 가는 험난한 여정을 그린 대규모 산수화이다. 기이한 절벽과 험준한 바위가 촉도의 험난한 여정을 시사하는 듯 변화무쌍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다양한 색감과 치밀한 구성으로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심사정이 평생에 걸쳐 이룩한 자신의 모든 화법을 집성하여 8m에 이르는 화면 위에 완성한 작품으로 동아시아 산수화의 수준 높은 경지를 보여주는 역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 김득신 필 풍속도 화첩(사진=문화재청) |
|
보물 제1987호 ‘김득신 필 풍속도 화첩’은 조선 후기 화가 긍재 김득신(1754~1822)이 그린 풍속도 8점으로 이루어진 화첩이다. 김득신은 본관이 개성으로, 백부 김응환, 동생 김석신, 아들 김하종으로 이어지는 18세기 이름난 직업화가(화원) 가문 출신이다.
이 화첩은 화가로서 김득신의 기량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상황과 역할에 따른 인물들의 움직임을 절묘하게 포착한 섬세한 감각이 돋보인다. 조선 시대 서민들의 일상을 담담하면서 해학적인 감성으로 표현했으며, 구도와 인물묘사, 공간감 등에 있어 김홍도 풍속화를 계승하면서도 인물의 표정과 심리묘사에 능했던 김득신의 개성이 드러난 대표작이다.
| 감지은니범망경보살계품(사진=문화재청) |
|
보물 제1988호 ‘감지은니범망경보살계품’은 수행자가 갖춰야할 마음의 자세와 실천덕목을 담은 경전으로, 14~15세기에 활동한 승려 대연이 주도하여 만든 것이다. 절첩 형식으로 앞부분에는 설법 중인 부처를 비롯해 제자들을 금니로 섬세하게 그린 변상도가 수록되었다. 변상도를 갖춘 조선 시대 사경은 매우 드물며, 그중에서도 ‘범망경’은 ‘백지금니범망보살계경’(1364년, 보물 제1714호) 등 소수만이 알려져 있을 뿐이다.
이 경전은 조선 시대의 드문 사경(불교 경전을 필사한 것) 형태라는 점, 수준 높은 변상도를 갖춘 점, 한국 불교 계율의 기초가 성립된 과정을 보여주는 자료라는 점에서 불교사·서지학·미술사학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 송조표전총류(사진=문화재청) |
|
보물 제1989호 ‘송조표전총류 권6~11’는 왕실의례에서 국왕에게 올리는 표문과 전문의 작성에 참고하기 위해 송나라의 표전 중 모범이 될 만한 내용을 모아 놓은 참고용 책으로, 1403년(태종 3)에 편찬됐다.
1403년에 주조된 금속활자인 계미자로 인쇄한 것으로, 현존하는 사례가 매우 희귀하며 완질본 역시 찾아보기 힘들다. 이 책은 현재 국보 제150호로 지정된 ‘송조표전총류 권7’에 비해 수록범위가 넓은 것이 특징이다. 자료의 보존 상태가 양호하며 조선 개국 후 처음으로 국가에서 만든 금속활자로 인쇄한 책인 만큼 고려와 조선의 활자 주조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 대곡사명 감로왕도(사진=문화재청) |
|
보물 제1990호 ‘대곡사명 감로왕도’는 1764년 불화승 치상을 비롯해 모두 13명의 화승이 참여해 그린 것이다. 상단에는 칠여래를 비롯한 불보살이, 중하단에는 의식장면과 아귀와 영혼들, 생활 장면 등이 짜임새 있는 구도 속에 그려져 있다. 온화하고 부드러운 색조가 조화를 이루어 종교화로서 숭고하고 장엄한 화격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이다.
‘대곡사명 감로왕도’는 제작 시기가 분명하고 봉안사찰, 시주자명, 제작주체 등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 18세기 불화 연구의 기준작으로서 가치가 높다.
| 익산미륵사지 사리장엄구(사진=문화재청) |
|
보물 제1991호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서탑 심주석의 사리공과 기단부에서 나온 유물이다. 639년(백제 무왕 40년) 절대연대를 기록한 금제사리봉영기와 함께 금동사리외호, 금제사리내호, 각종 구슬과 공양품을 담은 청동합 6점으로 구성되었다.
‘금동사리외호 및 금제사리내호’는 모두 동체의 허리 부분을 돌려 여는 구조로, 동아시아 사리기 중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독창적인 구조로 주목받고 있다. 전체적으로 선의 흐름이 유려하고 양감과 문양의 생동감이 뛰어나 기형의 안정성과 함께 세련된 멋이 한껏 드러나 있다.
‘금제사리봉영기’는 얇은 금판으로 만들어 앞·뒷면에 각각 11줄 총 193자가 새겨져 있다. 내용은 좌평 사택적덕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시주해 사찰을 창건하고 기해년(639)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이 봉영기는 그동안 ‘삼국유사’를 통해 전해진 미륵사 창건설화에서 구체적으로 나아가 조성 연대와 주체에 대한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밝히게 된 계기가 되어 사리장엄구 중에서도 가장 주목되는 유물이다.
‘청동합’은 구리와 주석 성분의 합금으로 크기가 각기 다른 6점으로 구성되어 있다. 청동합 중 하나에는 ‘달솔 목근’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이를 통해 달솔이라는 벼슬(2품)을 한 목근이라는 인물이 시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청동합’은 명문을 바탕으로 시주자의 신분이 백제 상류층이었고 그가 시주한 공양품의 품목을 알 수 있어 사료적 가치와 함께 백제 최상품 그릇으로 확인되어 희귀성이 높다.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백제 왕실에서 발원하여 제작한 것으로 석탑 사리공에서 봉안 당시 모습 그대로 발굴되어 고대 동아시아 사리장엄 연구에 있어 절대적 기준이 된다. 제작 기술면에 있어서도 최고급 금속재료를 사용하여 완전한 형태와 섬세한 표현을 구현하여 백제 금속공예 기술사를 증명해주는 자료이므로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매우 크다.
| 이숙기 좌리공신교서(사진=문화재청) |
|
보물 제1992호 ‘이숙기 좌리공신교서’는 이숙기(1429~1489년)가 성종의 즉위를 보좌한 공로를 인정받아 1471년(성종 2년) 3월 순성좌리공신으로 책봉된 이듬해인 1472년(성종 3년) 6월에 왕실로부터 발급받은 공신증서이다.
이 교서는 성종 추대와 관련된 정치적 동향과 참여자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원천 자료이자 처음 발급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15세기 후반 공신교서의 형태적 특징, 서체와 제작방식과 장정형태 연구를 위한 중요한 자료이다.
| 분청사기 상감 이선제 묘지(사진=문화재청) |
|
보물 제1993호 ‘분청사기 상감 경태5년명 이선제 묘지’는 조선 세종대 집현전 학사를 지낸 이선제(1390~1453)의 묘지로 1454년(단종 2년·중국연호 경태 2년)에 만들어졌다. 해당 문화재는 1998년 6월 일본으로 밀반출되었다가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일본인 소장가로부터 지난해 9월 기증받아 국내로 환수한 문화재다.
이 묘지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사각형 형태의 묘지와 달리 위패 형태로 제작된 것이 독특하다.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지던 묘지는 15세기 후반부터 사각형 백자 지석 형태로 제작되기 시작하는데, 그 과도기적 경향을 대표하는 유물이다. 조선 15세기경 변화하는 상장 의례와 도자 기술, 서체 연구를 위한 중요한 편년작으로서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주목된다.
| 지장시왕도(사진=문화재청) |
|
보물 제1994호 ‘지장시왕도’는 화기에 의해 1580년(선조 13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불화로 주존인 ‘지장보살과 무독귀왕, 도명존자’의 지장삼존을 중심으로 명부계를 다스리며 망자의 생전의 죄업을 판단하는 열 명의 시왕, 판결과 형벌 집행을 보좌하는 제자들을 한 화폭에 두었다. 화면은 다소 어두운 감이 있으나 색감이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신체와 각종 의장물의 묘사가 매우 세밀하면서도 뛰어난 묘사력을 갖추었다.
현존하는 조선 16세기 불화는 대부분 일본 등 국외에 있고 국내에 전해지는 작품은 매우 드물다. 이 작품은 지금까지 국내에서 유일하게 알려진 16세기 지장시왕도이자, 명확한 제작 시기를 갖추고 있고 인물의 배치와 구도, 지장보살을 비롯한 여러 보살 제자의 형상, 양식적 특징에서 조선 중기 불교회화를 대표하는 작품으로서 의의가 있다.
이번 보물 지정에 있어 주목되는 성과는 2017년부터 문화재청이 간송미술문화재단과 협력해 추진해 온 ‘간송 컬렉션’의 지정이 마무리되었다는 점이다. 그 결과 김정희 외 이정, 이징, 심사정, 김득신 등의 작품이 처음으로 보물로 지정되었다. 아울러 사군자, 화조화, 풍속화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국가지정에서 소외되었던 조선 시대 서화가들의 작품을 발굴하여 가치를 재평가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