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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윤 미술평론가] 한국전쟁의 포성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던 1952년 1월 어느 날 전남의 한 갈대숲. 국군은 포로들을 즉결 처형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포로 무리에는 화가 오지호(1905∼1982)도 있었다. 무릎을 꿇은 그의 머리에 총구가 겨눠지던 순간. 오지호는 갈대꽃 무리 사이로 내리는 석양을 봤다. 아름다웠다. 살고 싶었다. 살아서 아름다운 자연을 다시 그리고 싶었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도 빛은 찬란했다.
오지호는 1905년 12월 전남 화순군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초기 개화파였던 아버지는 일제강점기에 보성군수까지 지냈지만 일본이 조국에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안기자 점차 우울감에 빠졌다. 1919년 3월 대한제국 황제 고종의 장례식에 참석차 경성에 다녀온 뒤 한 달 만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오지호는 혼자가 됐다. 두 형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남은 한 형은 남의 집 양자가 된 상태였다. 얼마 뒤 그는 고향을 떠나 전주고보에 진학했고 이후 경성의 휘문고보로 편입했다. 모든 결정은 스스로 내렸다. 일본 도쿄미술학교에 입학한 것도, 예술가의 길 위에 서기 시작한 것도.
“그늘에도 빛이 있다”는 오지호의 신념은 일본 유학시절 생겼다. 인상주의의 영향이다. 도쿄미술학교에 다니며 그는 당시 일본 화단을 지배하던 인상주의를 접했다. 19세기 후반 프랑스 파리에서 시작된 이 화파는 매순간 달라지는 빛을 포착하고 그 빛과 함께 시시각각 움직이는 색채의 변화에 주목했다.
오지호가 유학하던 시기의 일본에서 인상파는 이미 서양화의 정석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오지호는 이들처럼 “회화의 근본은 빛”이라 믿었고 그 믿음은 그의 작품 전반에 녹아들었다.
그 대표적인 작품이 ‘남향집’(1939)이다. 유학을 마치고 조선에 돌아와 광복 전까지 살았던 개성의 집을 그린 작품이다. 작품 속에서 빨간 옷을 입고 있는 소녀는 작가의 둘째 딸, 누워 있는 강아지는 키우던 ‘삽살이’다. 주변 풍경을 정감 있고 따뜻하게 그려낸 평화로운 풍경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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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각각 변화하는 빛보다 어둠 속에 내린 빛 담아내려 해
일본을 통해 인상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은 분명하지만 오지호의 그림은 프랑스 인상주의자들과는 다르다. 무엇보다 오지호는 시시각각 변하는 빛을 포착하는 데 큰 관심이 없었다. 찰나의 빛을 담기 위해 빠른 붓놀림과 흐릿한 형태를 택했던 클로드 모네(1840∼1926)와 달리 오지호는 하나의 장면을 그릴 때 오랜 시간을 들였다. 사과밭을 그릴 때는 꽃이 피기 시작한 순간부터 질 때까지 무려 사흘을 꼬박 정성껏 관찰하며 작업했다. 만약 오지호가 모네 같은 프랑스 인상주의자였다면 열다섯 점은 거뜬히 그렸을 것이다. 하루에도 아침, 정오, 저녁, 밤의 빛을 각각 그려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면 오지호가 그리고자 한 것은 뭐였을까. 그는 이렇게 외쳤다. “빛의 약동, 색의 환희, 자연에 대한 감격, 여기서 나오는 것이 회화다. … 섬세히 윤택하게 자라는 젊은 생명! 이 환희! 이 생의 환희!” 결국 오지호가 그리고자 한 것은 빛 그 자체가 아니었던 거다. 그의 회화의 목적은 빛이 상징하는 생명의 에너지, 삶의 기쁨을 포착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과연 생의 환희를 노래할 만했을까. 결코 아니다. 나라의 상황은 갈수록 악화됐다. 일본에서 유학까지 했지만 나라를 잃은 슬픔에 아버지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기억이 지워질 리 없었다. 건강도 좋지 않았다. 1935년부터 1937년 사이 개성의 송도보고에서 교사로 일하던 그는 위출혈로 쓰러져 5개월간 병원에 입원했고 죽음의 위기를 겨우 넘겼다. 퇴원 후에도 위병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재발과 실신이 반복됐고 결국 그는 병원 치료를 포기한 채 단식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병을 다스려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나무의 그림자 속에서 빛을 찾아냈고 봄날 만개한 사과꽃의 생명력을 화폭에 담아냈다.
어렵게 살아난 오지호에게 또다시 삶의 고비가 찾아왔다. 1950년 그는 빨치산에게 납치됐다. 앞에서 본 ‘국군포로사건’은 바로 이때 일어난 일이다. 남부군 활동에 끌려다니던 중 오지호가 속한 부대는 광양 백운산에서 국군과 대치했고 대부분 사살됐다. 낙오된 그는 국군에 붙잡혔다. 갈대밭 바위 앞 죽음의 총구가 겨눠졌을 때 한 장교가 그를 알아보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서 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극적으로 살아난 오지호는 군법회의에 넘겨졌다. 1심에서는 20년형이 구형됐으나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고 풀려났다. 또 한 번 죽음의 고비를 넘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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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끝나 고향에 돌아왔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처참한 풍경이었다. 300여 점의 작품은 불쏘시개로 사라졌다. 절망이 밀려드는 상황에서도 오지호는 다시 붓을 들었다. 광주 외곽에 작은 초가집을 짓고 화초를 심었다. 그리고 또 한 번 생명의 아름다움을 그리기 시작했다.
유독 고난으로 점철된 인생이 있는 것일까. 머지않아 성난 파도가 또다시 오지호를 덮쳤다. 1961년 5·16군사정변이 일어난 다음 날 새벽에 갑자기 검거된 것이다. 군사정부가 범죄로 규정한 ‘민족자주통일중앙협의회’ 활동에 연루됐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그의 활동을 북괴 동조로 간주했고 빨치산 이력까지 있었던 오지호는 ‘빨갱이’로 몰려 10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이번에도 1심에서는 7년형이 선고됐으나 2심에서 무죄로 풀려났다.
극심한 스트레스 탓인지 출옥 후 위병이 재발했다. 단식으로 회복하는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친 뒤 그는 다시 붓을 들었다. 화면은 거칠어졌다. 시뻘건 색과 시퍼런 색이 강렬한 대비를 이루기도 하고 심해와 같은 어두운 푸른빛이 화면을 지배하기도 했다.
그러나 종국에 오지호의 화면은 다시 밝아졌다. ‘꽃-델피니움’(1981)을 보라. 이 싱싱한 꽃 무리의 아름다움을 그는 작고 1년 전 생생히도 담아냈다. 40여 년 전 ‘남향집’에서 그렸던 그림자 속 보랏빛과 푸른빛은 이제 꽃으로 만개해 영롱하게 빛난다. 그늘 속에서도 끝끝내 ‘빛’을 좇고 고난 속에서도 ‘생의 환희’를 놓지 않았던 오지호가 남긴, 진정한 생의 찬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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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긴 해도 오지호만큼 굴곡진 인생을 살아낸 사람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죽음의 문턱을 넘은 것만도 여러 차례다. 그런 삶 속에서도 그는 끝내 생에 대한 찬미를 놓지 않았다. 그늘 속에서 빛을 보고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했다. 할 만해서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낸 것이다. 그렇게 살아낸 그가, 그의 그림이,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우리를 격려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의 환희를 노래하라고.
△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려 했다는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일찌감치 작가의 길은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한국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귀국한 이후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 가을·겨울’(2025 출간 예정), ‘꽃피는 미술관: 봄·여름’(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