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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칼럼] 분재기를 통해 본 조선시대 상속문화

김민구 기자I 2015.04.08 03:00:01
[이배용 한국학중앙연구원장]옛 사람들은 재산을 나누는 것을 분재(分財)라고 했고 재산 상속 내용을 담은 문서를 분재기(分財記)라고 불렀다.

분재는 크게 3가지로 나눈다. 첫째, 부모가 만년에 자식들을 모아 놓고 자신의 전 재산을 분할하면서 작성한 분재기 ‘분급(分給)’이 있다. 둘째, 부모가 사망한 후 자식들이 모여 부모 재산을 나누며 작성한 분재기를 ‘화회문기(和會文紀)’가 불렀으며 셋째, 특별한 사유로 재산 일부를 증여하는 ‘별급(別給)문기’가 있다.

조선시대 분재기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공정과 합리의 정신이 담겨있다. 특히 여성과 약자를 배려하는 한국적 가치관이 반영됐다. 조선시대 법전 ‘경국대전’에 따르면 재산을 딸, 아들 구별 없이 동등하게 상속하지만 제사를 지내는 자손에게 1/5을 더 주고, 서자에 대한 차별로 양첩자녀에게 1/7, 천첩자녀에게 1/10을 준다.

분재기에 등장하는 여성은 남녀평등을 뛰어넘어 당당하기까지 했다. 독자적인 재산권을 갖고 자신의 자녀는 물론 외손자나 친정 조카까지 보살필 수 있었던 것이 조선시대 여성들의 참모습이었다.

남편이 사망하면 어머니가 재주(財主)가 돼 상속을 주관하는 것은 자연스런 관행이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안동 하회마을에 풍산류씨 충효당(忠孝堂)에 소장된 ‘류중영처김씨분급문기’다. 이것은 선조 27년인 1594년 류중영 아내 김씨 부인(징비록(懲毖錄)을 쓴 서애(西厓) 유성룡의 어머니)이 자녀 5남매에게 재산을 나눠줄 때 작성한 것이다. 나눈 재산의 몫에 아들과 딸의 차등이 없었으며 현직 영의정으로 국무를 총괄하던 류성룡도 이날만큼은 한 집안 작은 아들이자 어머니 지침을 따르는 경제적 수혜자의 한 사람일 뿐이었다.

한편 여성이 자녀 없이 사망하면 그 재산은 그대로 친정에 귀속되는 경우가 많았다. 적어도 조선 중기까지는 남녀균분의 상속이었다가 후기에 유교체제가 강화되면서 맏아들 중심으로 바뀌었지만 약 250년 정도만 차별의 논리가 적용됐다.

공정과 합리의 정서에서 약속의 이행 여부는 신뢰사회를 가늠하는 지표다. 아버지가 딸이 어렸을 때 무심히 집을 주겠다고 한 약속을 딸이 성장하자 지키는 사례, 정유재란 때 포로로 잡혀간 형제가 20년 만에 돌아오자 다시 분재를 작성한 사례 등 부모와 자녀 간에, 형제간 우의와 신의가 돋보이는 장면이 무수히 많다.

현재까지 남겨진 분재기를 보면 우리나라가 매우 정교한 기록 문화의 나라임을 보여준다. 재산 상속 대상자가 모두 참석한 가운데 한 쪽에서는 계산하고 한쪽에서는 기록하면서 초안을 작성한 후 최종 합의에 이르는 과정을 상세히 기술했다.

마지막에 서로 합의한 후 서명할 때 여성은 도장을 찍고 남성들은 한결 같이 한문 이름을 멋지게 디자인해 서명했다. 이는 사인(Sign)문화가 서양에서 건너온 수입품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로부터 전통적으로 내려온 관습이라는 점을 알 수 있게 만드는 대목이다. 우리 전통문화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우리 것을 너무 모르고 지나왔음을 새삼 깨닫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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