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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칼럼]‘함께’는커녕 ‘따로’도 힘든 한일 관계

포럼사무국 기자I 2024.08.14 05:00:00
[정재숙 전 국가유산청장] 폭염(暴炎)과 염천(炎天) 두 단어에 들어 있는 한자 불탈 ‘염’(炎)에 왜 불 화(火)자가 겹쳐 있는지 실감하는 여름이다. 잠 못 이루는 밤을 그나마 견디게 해준 일등 공신은 2024 파리올림픽이었다. 100년
만에 다시 파리에서 점화한 올림픽 성화는 한국 선수단의 선전에 힘입어 더 뜨겁게 타올랐다,

17일 내내 각본 없는 드라마가 펼쳐진 이번 올림픽은 특히 여성들에게 잊을 수 없는 대회로 각인됐다. 사상 최초로 참가 선수 남녀 수를 똑같이 해 ‘완전히 개방된 대회’라는 표어를 실감케 했다. 여성이 현대 올림픽에 처음 등장한 1900년 파리올림픽에서 전체 참가 선수 가운데 2.2%가 여성이었다는 점을 돌아보면 2024년 파리올림픽은 일단 ‘성 평등 올림픽’이라 불릴 만한 역사적 사건이다. 2020 도쿄올림픽 폐회식에서 남녀 공동시상으로 눈길을 끌었던 마라톤은 올해 여성 우승자에게 단독으로 마지막 메달을 걸어줌으로써 진일보한 마침표를 찍었다.

파리올림픽의 이런 정치적 올바름과 포용·형평·다양성을 끌어안는 관용의 정신은 이미 3년 전에도 기미를 보였다. 코로나19 탓에 2021년 열린 2020 도쿄올림픽의 구호에는 기존 ‘더 빨리, 더 높이, 더 힘차게’에 ‘다 함께’가 추가됐다. 인종, 성별 등의 차별을 반대하고 다양성의 통합을 이뤄 평화를 실현하자는 의미가 담긴 문구였다. 이때부터 여러 경기에 혼성팀(Mixed Team) 출전이 추가된 것을 보며 격세지감을 느낀 이들이 많았다. 역사는 천천히 진보한다.

올림픽 개최국으로서 ‘함께’를 내세웠던 일본은 한국과의 관계에서는 철저하게 양면성을 보인다. 도무지 함께할 수 없는 이웃 나라인 셈이다. 지난달 27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일본 사도광산(佐渡金山)이 한 예다. 일제강점기 한국인 노동자를 강제 동원하고 강제 노역시킨 사실을 철저하게 숨긴 채 인류가 기려야 할 문화유산으로 자랑하고 있다.

그런데 곰곰이 들여다보면 정작 피해자인 한국 정부가 이 등재에 동의했다는 게 더 큰 잘못이다. 일본 정부가 등재 전에 사도광산 전시 내용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강제’라는 표현 명시 요구를 거부했음에도 한국 정부는 이를 어물쩍 수용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는 회원국 만장일치 원칙 때문에 만약 한국이 반대 의사를 밝혔다면 표결로 가게 돼 그 결과는 장담할 수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저자세 협상, 굴욕외교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는 배경이다. 결국 우리 문제를 우리가 그르친 것이다.

79주년 광복절에 개봉하는 기록영화 ‘1923 간토대학살’은 해묵은 한일 관계의 난점을 적나라하게 파헤친다. 1923년 9월 관동 대지진 당시 무고한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한 사건을 다룬 이 다큐멘터리는 101년이 지난 지금도 이 비극이 현재진행형임을 보여주고 있다. 4년여가 넘는 촬영 기간에 제작진이 일본에서 발견한 문서와 증언 등은 간토 대학살이 당시 일본 정부가 대지진으로 흉악해진 민심을 수습하고 위기에서 탈출하기 위해 조선인 학살을 선동한 국가 범죄임을 명백히 드러낸다.

그럼에도 일본 정부는 국회에서 진상 규명을 촉구하는 국회의원에게 관련 자료를 찾지 못해 더 이상 조사할 수 없다는 말만 늘어놓는다. 지난 5월 이 다큐멘터리가 일본 국회에서 상영됐을 때 김태영 감독을 인터뷰한 프랑스 신문 ‘르 피가로’의 특파원 기사 제목이 이 사실을 직시하고 있다. ‘간토 대학살, 일본이 완전히 망각하고 싶어하는 범죄-1923년 일본 자경단은 간토 대지진에 이은 공황 상태에서 수천 명의 한국인을 학살했다. 여러 증거에도 불구하고 도쿄는 이러한 살육을 끈질기게 부인하고 있다.’

간토 대학살 역시 한국 정부는 한 세기가 지나는 동안 그 진상을 밝히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1920년대 집중 조사로 학살당한 조선인 수를 6661명으로 알린 정도가 다였다. ‘함께’는커녕 ‘따로’도 어려운 한국과 일본이다.

내년 2025년은 한일 수교 60주년이자 광복 80주년이다. 영화는 말한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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