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워-스트래티지(WarStrategy)
전쟁은 무기의 질, 병력의 수보다 어떻게 준비하고 어떤 전략과 작전을 바탕으로 전투를 수행하느냐에 따라 승패가 결정된다.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페르시아 전쟁 등 인류사의 향배를 결정지은 수많은 전쟁과 이에 얽힌 전략적 사유를 통해 개인과 국가의 행위를 이해하는 폭을 넓힌다.
☆ 최영진 중앙대 정치국제학과 교수
중앙대에서 정치국제학과 교수로 재직. 한국정치외교사학회 회장, 육군, 지작사, 특전사 발전자문위원. ‘전쟁과 미술’ 발간. ‘현대군사명저를 찾아’, ‘군사고전 다시읽기’, ‘역사속의 군사전략’ 등 기고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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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에서 예루살렘까지…십자군 전쟁이 뭐길래
십자군 전쟁은 11세기 말(1096년)부터 13세기 말(1270년)까지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을 탈환하기 위해 수차례에 걸쳐 감행한 대원정을 말한다. 당시 전쟁에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십자군 전쟁이란 별칭이 붙었다. 최 교수는 “파리에서 예루살렘까지는 4500㎞의 거리이다. 하루 20㎞씩 걸어가도 8개월이 소요된다”면서 “200년간 지속된 십자군 전쟁은 큰 원정만 해도 9차례나 시도된다”고 전쟁의 규모를 설명했다.
십자군 전쟁은 셀주크 제국의 급속한 팽창으로 부담을 느끼던 비잔틴 제국의 알렉시오스 1세가 로마 교황청에 도움을 청하면서 시작된다. 최 교수는 “알렉시오스 1세가 내세운 명분은 예루살렘으로 가는 순례자들이 박해를 받는다는 것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교황 우르반 2세는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예루살렘 해방을 외치며 무장순례를 명한다. 최 교수는 “유럽 사회 내부로 향하던 기사들의 폭력을 외부로 돌릴 필요도 있었을 것”이라고 봤다.
교황은 십자군에 참전하는 이들에게 즉각적인 속죄와 구원을 약속했다. 당시 종교적으로 경건한 삶을 살던 유럽인 입장에서는 더할 나위 없는 특전이다. 이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원정대에 참여하게 만든다. 실제 제1차 십자군의 표어는 ‘하느님께서 원하신다’(Deus vult·God’s Will)였다. 최 교수는 “종교적 이유가 컸겠지만, 기사들의 세속적 탐욕과 야망도 작용했을 것”이라며 “둘간 결합으로 장대한 역사가 시작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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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6년 출발하는 1차 십자군은 기사들이 중심은 아니었다. 일반 성도들로 구성된 이들은 군중십자군이라 불리었다. 최 교수는 “안타깝게도 이들이 많은 유대인을 학살한다. 유대인 거주지에서 약탈과 방화도 자행했다”면서 “그러나 정작 니케아에서는 몰살당하고 만다”고 했다.
이에 1097년부터는 툴루즈의 레몽, 부용의 고드프루아, 불로뉴의 보두앵, 타란토의 보에몽 등 네 명의 왕자들이 기사로 참여하는 본격적인 십자군 운동이 전개된다.
이들은 콘스탄티노플에 모여 예루살렘을 어떻게 탈환할 것인지, 이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지에 대해 머리를 맞댄다. 이들은 해안선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접근하는 전략을 택한다. 해상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이에 따라 1097~1098년 중동 북부 도시인 안티오크에 집결해 봉쇄전을 펼친다.
당시 이슬람은 분열돼 있었다. 안티오크는 8개월간 저항하며 저력을 과시했으나 자체 병력만으로 대응하다 보니 결국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곧이어 1099년 예루살렘 공성전이 벌어진다. 최 교수는 “십자군은 중요한 무기였던 공성탑을 만들기 위해 제노바에서 들어온 범선을 해체한다”면서 “공성전에서 선두에 섰던 고드프루아는 예루살렘 왕국의 첫 통치자가 된다”고 말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 통치를 공고히 하기 위해 보급로인 해안 도시를 추가로 장악해나간다. 하이파(1100년), 아르수프(1101년), 토르토사(1102년), 아크레(1104년), 트리폴리(1109년), 티레(1124년) 순이다. 이로써 해안 교두보를 완전히 확보한 것이다. 요새화된 해안도시를 함락시키는 데 투석기가 중요한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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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십자군 전쟁의 승리로 4개의 십자군 국가가 형성된다. 최 교수는 “9차례 십자군 전쟁 가운데 가장 큰 성과를 냈다”고 평가했다. 1119년 순례자 보호를 위해 창설된 템플 기사단은 군사적 기능을 강화한다. 특히 몽기사르 전투(1177년)에서 큰 전공을 세운다. 1023년 순례자 구호소로 출발한 구호기사단도 빼놓을 수 없다. 구호기사단은 1153년 아스칼론 봉쇄전과 같은 큰 전투에서 존재감을 과시한다.
최 교수는 “십자군 국가들은 동쪽에서 압박해오는 이슬람, 남쪽에는 이집트로 둘러싸여 있어 양동 공격이 이뤄질 경우 대응이 어렵다고 판단했다”면서 “내륙에 추가 거점을 만드는 후배지 전략에 따라 알레포를 연이어 공격하지만 실패한다”고 말했다.
한편 분열을 끝내고 통합의 길을 걷던 이슬람 세력은 1044년 에데사 지역을 수복한다. 4개의 십자군 국가 중 한 곳을 거의 잃을 위기에 처하자 로마 교황청은 발칵 뒤집어진다. 교황은 2차 십자군원정을 주창한다. 이에 프랑스 루이 7세와 독일 콘라트 3세 등 두 명의 국왕을 필두로 한 십자군 원정대가 1148년 아크레에 모인다. 하지만 이들의 다마스커스 공격은 어이없이 실패한다.
최 교수는 “적의 매복을 피해 다마스커스 동쪽에서 진격을 감행하지만, 물과 식량이 떨어진데다 이슬람 지원군의 합류 소식에 후퇴한다”면서 “2차 십자군 전쟁은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 난다”고 말했다. 후배지 공략을 통해 내륙에 거점을 만들려는 작전이 거듭 결실을 거두지 못한 것이다.
이 때문에 십자군은 이집트를 공략해 후방을 든든히 하는 전략으로 선회한다. 1154년부터 1169년까지 이집트를 손아귀에 넣기 위해 노력한다. 이 무렵 이슬람에는 걸출한 지도자가 등장하는데, 그는 바로 ‘살라딘’이다.
최 교수는 “살라딘은 1171년 수니파임에도 불구하고 시아파 지역인 이집트를 장악하면서 역량을 드러낸다”면서 “이를 기반으로 3년 후에 다마스커스, 또 7년 후에는 알레포로 확장해 처음으로 이집트와 시리아를 통합하는 데 성공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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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부터 십자군은 수세에 몰린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는 1140년 증축을 시작해 1170년 완성한 크락 데 슈발리에 성이다. 2000여명이 주둔 가능한 요새다. 이런 ‘보두앵 4세’의 수동적인 태도에 기사들은 반감을 품는다. 예루살렘 왕국을 중심으로 다시 강경세력이 득세하고 이 중 보두앵 4세, 5세 사후에 실권을 잡은 ‘기 드 뤼지냥’이 핵심 중의 핵심이다.
하지만 의욕이 앞섰던 나머지 그의 군대는 1187년 하틴 고지 앞에서 살라딘이 이끄는 이슬람 군대에 몰살당한다. 하틴 전투 결과, 살라딘은 예루살렘 왕국의 항복을 받아낸다.
예루살렘은 물론 주요 해안 거점도 상실하면서 1189년 제3차 십자군원정이 진행된다. 영국 리처드 3세와 프랑스 필립 2세는 적의 수중에 들어간 항구 도시 아크레를 되찾아온다. 아크레는 다시 예루살렘을 노릴 수 있는 교두보다. 3차 원정 결과 자파에서 티레까지 해안 거점을 확보하는 성과를 낸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나선 6차 십자군 전쟁(1228~1229년) 또한 평화협정을 통해 예루살렘 일부를 추가로 탈환한다. 최 교수는 “3차 이후 십자군은 총칼이 아니라 ‘힘에 기반한 외교’로 바뀌고 있었다”면서 “그 뒤에도 크고 작은 십자군원정은 있었지만 1244년 예루살렘, 1289년 트리폴리 백작령, 1291년 아크레를 연달아 상실한 끝에 전쟁은 사실상 종식된다”고 했다.
최 교수는 “200년간 계속된 십자군 전쟁은 종교적 열정에 기대고 있었다”면서 “해안-후배지-외곽을 장악하는 합리적인 전략을 구사했으나 일부 역량 부족에 직면해야 했다”고 정리했다. 그러면서 “마지막 100년간은 총칼로 해결할 수 없었던 종교적 문제를 상호 양보함으로써 일정 부분 해소할 수 있었다”고 총평했다. “이런 장구한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한다면 또다시 같은 잘못을 반복할 수밖에 없다”고 최 교수는 힘줘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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