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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윤 미술평론가] 1895년 4월 17일. 청나라와 일본은 시모노세키에서 조약을 맺었다. 양국 사이의 전쟁을 끝낸다는 얼핏 평범한 약속이었지만, 실은 청나라에겐 치욕스러운 내용이었다. 대만 등의 청나라 령을 일본에게 넘기고, 조선이 청의 예속국이 아닌 독립국임을 확인하는 조항이 담겼기 때문이다. 오래도록 동아시아의 패권을 쥐고 있던 중국은 19세기 말, 이렇게 그 명을 다하고 있었다.
쉬베이훙(徐悲鴻·1895∼1953)은 저물어가는 청나라 말기, 그것도 시모노세키조약이 맺어진 그해에 태어났다. 시대도 어렵고 가정형편도 곤궁했지만, 그는 배움과 경험의 기회를 있는 힘껏 잡았다. 어린시절에는 아버지에게 서예와 중국화를 배웠고, 상하이로 건너가 그림을 그리며 생계를 유지했으며, 스물두살에는 일본 도쿄에 가서 미술을 배웠다. 스물넷에는 프랑스 정통미술의 정수, 에콜 데 보자르에 입학했다. 낭만주의의 거장 유진 들라크루아와 인상주의의 대표주자 에드가 드가 같은 미술가가 졸업한 명문이었다. 나라에서 준 장학금과 20대 초반부터 익힌 프랑스어가 십분 도움이 됐다. 그렇게 1919년부터 1925년까지 쉬베이훙은 파리를 본거지로 밀라노·피렌체·로마·스위스 등지를 여행하며 국제적 감각도 길렀다. 중국의 잡지에 자신이 접한 유럽미술에 대해 기고하기도 했다. 해외연수란 예외적인 특혜를 보다 많은 중국인과 나누고자 함이었다.
유럽에서 쉬베이훙은 전통적인 방식으로 그린 서양화에 끌렸다. 원근과 비례, 양감 표현이 정확하며, 세부묘사가 끝내주는, 한마디로 ‘나는 못 그릴 것 같은’ 그림 말이다. 그는 그중에서도 사실적인 역사화를 최고로 쳤다.
이는 꽤 흥미로운 선택이다. 쉬베이훙이 서유럽에 머물던 때 사실적인 역사화는 이미 낡아빠진 장르로 취급받고 있었다. 인상주의조차 한물갔던 시기였다. 파블로 피카소가 ‘아비뇽의 여인들’(1907)을 내놓은 것이나 앙리 마티스가 야수처럼 물감을 쳐바르던 것으로부터도 무려 10년도 더 지난 시점이었다. 이미 파리는 남자 소변기를 작품으로 제시한 마르셀 뒤샹 같은 미술가가 활동하던 시대로 접어든 뒤였다.
◇“법칙 얽매인 그림 그만!…정확하게 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라”
그럼에도 쉬베이훙은 사실적인 역사화를 선호했다. 이유는 여러 가지일 거다. 그가 파리의 보수적인 학교에서 교육을 받아서일 수도 있고, 그 커리큘럼만으로도 충분히 새로워서 굳이 다른 자극을 찾을 필요가 없었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더 근본적인 이유는 쉬베이훙이 당시 중국에는 ‘정확한 표현기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역사화에 끌린 것 또한 중국의 찬란한 영광을 생생히, 그리고 영원히 남기고자 함이었다.
쉬베이훙에게는 전통적인 중국화야말로 낡은 것이었다. “세계 모든 문명이 퇴화하는 법이 없으나, 오로지 중국의 그림만이 20년 전에 비해 50보, 300년 전에 비해 500보, 500년 전에 비해 400보, 700년 전에 비해 1000보, 1000년 전에 비해서는 800보를 퇴보했으니 이 민족의 부진함이 개탄스럽다.” 쉬베이훙의 한탄이다. “법칙에 얽매여 선생님의 그림을 베끼는 것은 제발 그만! 너의 눈으로 정확하게 보고 사실적으로 표현하라”는 게 쉬베이훙의 외침이었다. 과학적 사고를 바탕으로 만든 신식 무기를 들고 쳐들어온 외세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미술 또한 변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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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베이훙은 자신의 주장을 그림에 고스란히 구현했다. 유화(‘자화상’ 1924)나 소묘(‘여인상’ 1924)는 물론이고, 중국화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우공이산’(1940)이 그 예다. ‘우공이산’은 흡사 서양식 누드화 같지만 종이에 그린 수묵채색화다. 자신의 철학대로, 그는 인체의 비례와 원근을 정확히 표현했으며, 각 인물의 골격과 근육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표정 또한 다양하고 생생하다. 옛 중국화에서 인물이 작고 간략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기법이다.
다만 ‘우공이산’의 내용은 다시 중국이다. 전국 시기에 쓰인 ‘열자’(列子)의 ‘탕문’(湯文) 편에 나오는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스토리는 대강 이렇다. 옛날에 아흔에 가까운 나이의 우공(그림 중앙 백발의 왜소한 노인)이 살았다. 그가 사는 동네에는 사람들이 마을에 있는 큰산 때문에 불편을 겪었다. 이에 우공은 자식들과 함께 산을 옮기기로 결정하고, 매일 조금씩 돌과 흙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실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한들 그 양이 얼마나 되겠나. 비웃는 친구에게 우공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비록 늙었지만, 내게는 자식도 있고 손자도 있네. 그 손자는 또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은 또 자식을 낳겠지. 우리는 이렇게 대대손손 이어지지만 산이 더 불어나는 일은 없지 않나. 우리가 멈추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평평하게 되겠지.”
친구는 우공의 혜안에 감탄했다. 그런데 그들의 이야기를 엿듣고 깜짝 놀란 이가 있었다. 바로 산신령이었다. 산이 없어진다면 그의 터전도 사라질 터. 산신령은 부랴부랴 옥황상제에게 올라가 우공을 말려 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옥황상제는 되레 우공의 의지에 감동해 당장 산을 다른 곳으로 옮겨줬다. 모두가 힘을 모아 포기하지 않는다면 세상에 못할 게 없다는, 아름답고도 교훈적인 이야기다.
◇후학양성에도 정성 쏟아…중국 미술사에 영원히 이름 새겨
그런데 쉬베이훙은 왜 하필 이 이야기를 그렸을까. 4m도 넘는 화면에 그릴 만큼 중요한 이야기인가. 그저 ‘옛날이야기를 좋아했나 보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렇게만 넘기기에는 그림을 그린 연도가 심상치 않다. 때는 1940년, 제2차 중일전쟁이 한창이었을 시기. 앉으나 서나 나라를 생각하던 그가 국가의 존망이 달린 이 절체절명의 시기에 아무 이야기나 그렸을 리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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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베이훙은 이 그림을 통해 중국인들에게 응원을 건네고자 했다. ‘우리 선조는 산을 평평하게 만드는 불가능한 일도 결국 해냈다! 우리 또한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싸운다면 반드시 전쟁에서 승리할 것이다!’ 화면에서 주인공 우공보다 그 자손들을 전면에 더 강조해 그린 것 또한, 산을 옮기는 데 후손의 역할이 중요하듯 전쟁에서도 계속해서 싸워나가는 의지가 중요함을 표현하고 싶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쉬베이훙은 그림을 그리는 것 외에도 전시기획이나 교육에도 힘썼다. 모두 나라를 위해서였다. 전시를 만들어 싱가포르나 인도 등에 수출해 나라의 위상을 높였고, 전쟁을 막기 위한 기금을 모았으며, 중국의 여러 대학에서 일하며 다음 시대를 책임질 화가를 대거 배출했다. 이런 쉬베이훙을 새 시대의 리더 마오쩌둥까지도 마음에 들어 했고,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도 그는 승승장구할 수 있었다. 갑작스러운 뇌일혈로 58세에 사망하는 1953년까지, 쉬베이훙은 중국 미술학교의 최고봉인 베이징중앙미술학원의 원장을 지내고, 중국예술가연맹의 의장을 맡으며 중국 미술사에 영원히 이름을 새겼다.
무엇을 하든 나라를 위하는 쉬베이훙의 사고방식은 다소 낯설기도, 약간 부담스럽기도 하다. 요즘 우리는 일신의 안위를 좇는 것만으로도 버거우니까. 그처럼 나라가 계속해서 위기를 맞는 시대를 살았다면 조금 달랐을까. 아니면 쉬베이훙이 오늘날 한국을 살았다면 어땠을까. 그 또한 ‘나라’보다는 ‘나’에 집중하며 살았을까. 쉬베이훙의 삶과 작품을 보며 ‘애국’이란 말에 대해 새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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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하윤 미술평론가는…
1983년 생. 그림은 ‘그리기’보단 ‘보기’였다. 붓으로 길을 내기보단 붓이 간 길을 보고 싶었단 얘기다. 예술고를 다니던 시절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에 푹 빠지면서다. 이화여대 회화과를 졸업했지만 작가는 일찌감치 접고, 대학원에 진학해 미술사학을 전공했다. 내친김에 미국 유학길에 올라 캘리포니아주립대 샌디에이고 캠퍼스에서 중국현대미술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사실 관심은 한국현대미술이었다. 하지만 그 깊이를 보려면 아시아란 큰물이 필요하겠다 싶었고, 그 꼭대기에 있는 중국을 파고들어야겠다 했던 거다. 귀국한 이후 미술사 연구와 논문이 주요 ‘작품’이 됐지만 목표는 따로 있다. 미술이 더 이상 ‘그들만의 리그’가 아니란 걸 알리는 일이다. 이화여대 등에서 미술교양 강의를 하며 ‘사는 일에 재미를 주고 도움까지 되는 미술이야기’로 학계와 대중 사이에 다리가 되려 한다. 저서도 그 한 방향이다. ‘꽃피는 미술관’(2022), ‘여자의 미술관’(2021), ‘커튼콜 한국 현대미술’(2019), ‘엄마의 시간을 시작하는 당신에게’(2018) 등을 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