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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많던 자금, 씨가 말랐다’…자본 시장에 퍼지는 펀딩 주의보

김성훈 기자I 2022.09.21 18:21:24

자본시장 분위기 저하…펀딩에 치명타
넘치던 유동성 마르며 자금난 본격화
보수적 투자기조…금리 인상 부담까지
콘테스트+컨소시엄 제안 등 생존 모색
스타트업 투자 초토화…줄도산 우려도

[이데일리 김성훈 기자] “펀딩(자금유치)이 예전 같지 않다. 최근 운용사들이 가장 어려워하는 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수천억원 규모 펀딩을 진행했던 한 경영참여형 사모펀드(PEF) 운용사 관계자는 시장 분위기를 묻는 말에 이렇게 답했다. 평소 좀처럼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던 이 관계자는 “(펀딩) 분위기가 꺾인 것을 체감했다”며 자금 유치 과정에서의 어려움을 털어놨다. “말은 안 해도 최근 펀딩을 진행 중인 운용사들의 경우 어려움이 적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픽=이데일리 이미나 기자]
자본 시장을 가득 채우던 유동성이 바닥을 드러내면서 PEF 운용사와 VC(벤처캐피털) 사이에 ‘펀딩 주의보’가 내려졌다. 운용사 역량을 총동원한 끝에 좋은 투자처를 발굴했더라도 자금난에 막혀 갈무리를 맺지 못하는 사례가 늘고 있는 것이다. 매물 잠재력만 잘 어필하면 척척 자금을 쏴주던 기관투자자들이 보수적인 기조로 방향을 튼데다 전략적투자자(SI)들도 곳간 단속에 나서면서 시중 자금이 쪼그라든 게 결정적인 원인으로 꼽힌다.

하루아침에 자금난에 빠진 운용사들은 위탁 운용사 콘테스트 출전과 PEF간 투자 제의 등 해결책 마련에 한창이다. 운용사들이 굴리는 자금이 줄면서 이들 투자를 자양분 삼던 스타트업 상황마저 위태로워지는 연쇄 작용 조짐까지 나타나고 있다. 자칫 이러한 흐름이 장기화할 경우 그간 쌓아올린 자본시장 환경이 한꺼번에 무너질 수 있다는 우려감마저 커지는 모습이다.

금리 블랙홀…그 많던 자금 다 사라졌다

지난해까지 M&A(인수합병)나 지분 투자가 줄 잇던 자본시장 분위기는 최근 몰라보게 바뀌었다. 시장을 뒤흔든 블랙홀은 뭐니뭐니해도 급속도로 오른 금리다. 불과 1년 만에 2%포인트나 뛴 금리에 유동성이 마르면서 투자 위축을 부추겼다. 이런 가운데 물가 인상에 증시 침체까지 더해지자 분위기는 더 험악해졌다. 자본시장 주축 참여자인 운용사들의 활동에 제약이 생길 수밖에 없는 이유다.

시장 관계자들이 꼽는 가장 큰 타격은 단연 펀딩이다. PEF 운용사나 VC들이 하는 비즈니스 활동이 기관투자자들의 ‘빌린 돈’으로 한다는 점을 떠올리면 시중 자금이 마른 현 시점이 위기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치솟은 금리에 제도권 금융기관으로 충당해야 하는 인수금융 부담이 한층 커진 점도 무시할 수 없다. 한 업계 관계자는 “진퇴양난(進退兩難)이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유동성을 기회 삼아 조(兆)단위 블라인드 펀드(투자 대상을 정하지 않고 목표수익률만 제시한 뒤 투자금을 모으는 펀드)를 내놓겠다던 운용사 분위기에도 변화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렵지 않게 펀딩을 마칠 수 있을 것이란 예상을 깨고 분위기가 급변하자 ‘시간을 두고 진행하자’는 기조로 방향이 바뀌었다.

[그래픽=이데일리 김정훈 기자]
기존에 대형 펀드를 보유하고 있거나 이름값 있는 초대형 운용사들은 그나마 사정이 좀 낫다. 이른바 ‘유동성 낙수 효과’를 노리던 중견·독립계 운용사들의 타격은 치명적이라는 게 업계 설명이다. 기관투자자들의 보수적인 투자 기조가 뚜렷해지자 트랙레코드(투자이력)가 확실한 운용사에만 자금을 집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괜찮은 딜소싱(투자처 발굴)에 성공했더라도 투자에 나설 수도 없는 셈이다.

상황이 이렇자 자금난에 빠진 중견 운용사들은 국내 연기금이나 공제회가 주최하는 위탁 운용사 콘테스트에 사활을 걸고 있다. 위탁 운용사 선정을 발판 삼아 다른 위탁사 선정까지 노린다는 전략이지만, 국내 주요 기관투자가들이 출자 규모를 줄이고 있어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는 모습이다.

상황 장기화하면 ‘스타트업 줄도산’ 우려

자금난 해결을 위해 상대적으로 자금 여유가 있는 운용사에게 투자를 제안하기도 한다. 자본시장에 따르면 실제로 한 중견 PEF 운용사는 최근 블라인드 펀드를 보유한 PEF 운용사를 돌며 투자를 제안했다. PEF 운용사가 조성하는 펀드에 PEF 운용사가 재무적투자자(FI)로 들어갈 수 없다 보니 컨소시엄 형태를 빌려 투자를 제안한 것이다.

한 자본시장 관계자는 “포장은 컨소시엄과 같은 형태를 띠지만, 사실상 자신들이 발굴한 딜을 다른 운용사에 보여주고 자금을 받는 것으로 이해하면 될 것 같다”며 “보통의 상황이나 경우였다면 잘 일어나지 않는 일인데, 최근 자금난에 그런 제안이 나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래픽=이데일리 문승용 기자]
문제는 앞으로다. 자본시장 참여자 모두가 수긍하는 부분이 ‘현재 상황이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다’는 점이다. 널 뛰는 금리와 달러 여파로 자금난에 빠진 현재의 분위기가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는 데 힘이 실리고 있다. 국내에서 노릴만한 펀딩 경로가 정해져 있는 데다 이마저도 운용사마다 모두 뛰어들면서 악순환을 이어가고 있다.

최근 펀딩을 진행 중인 운용사들 입장에서도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유동성만 받쳐줬다면 어렵지 않았을 작업 난이도가 몰라보게 높아져서다. 최근 프리IPO(상장 전 자금유치)에 나선 SK온(한투PE컨소시엄)과 여의도 IFC빌딩(미래에셋자산운용), 싱가포르 전자·전기폐기물업체 테스(SK에코플랜트) 등이 수천억원, 많게는 수조원대 펀딩을 진행 중이다. 파격적인 배당수익률 등의 투자 조건을 내걸며 자금 유치에 나섰지만, 투자처별 희비가 엇갈릴 것이란 견해 또한 적지 않다.

일각에서는 대형 M&A를 위한 펀딩보다 더 무서운 것이 운용사들 자금을 자양분 삼던 스타트업이라는 말도 나온다. 운용사들의 펀딩 난항에 스타트업 투자 활기도 급격히 식어가는 모습이다. 수천억원 밸류에이션(기업가치)를 자랑하던 기업들이 매각을 검토하는가 하면 ‘대박’을 꿈꾸며 기존 직장을 박차고 나온 임직원 전원을 권고사직 처리하는 현상도 이와 무관치 않다는 평가다.

한 VC 업계 관계자는 “스타트업의 상황이 심각하다 못해 위태로운 상황이다”며 “자칫 이러한 흐름이 장기화할 경우 잠재력 있던 스타트업들이 줄줄이 주저앉는 상황이 생길까봐 우려가 되기도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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