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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절된 동물의 몸, 해방을 말하다…佛 개념미술가의 메시지

이윤정 기자I 2024.02.13 05:30:00

에티엔 샴보 개인전 '프리즘 프리즌'
'언테임드' 연작 등 선보여
"광학·동물의 신체 등 해방 방식 고민"
3월 9일까지 에스더쉬퍼 서울

[이데일리 이윤정 기자] 서울 용산구 에스더쉬퍼 서울 갤러리 2층 전시장 입구에는 관람객을 위한 손전등이 비치돼 있다. 손전등을 들고 어두운 전시장 안으로 입장해 작품을 직접 비추면서 관람하는 방식이다. 손전등을 벽면에 있는 작품에 비추자 분절된 말의 몸이 나타났다. 몸통이 금빛 배경에 가려 머리와 꼬리만 보이는 형태다. 프랑스 파리에서 활동하는 개념미술가 에티엔 샴보의 ‘언테임드’(Untamed, 야생 그대로의) 연작에서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작가는 절묘한 분절감을 강조하기 위해 전시장 내부를 선사시대의 동굴처럼 어둡게 조성하는 특별한 관람 환경을 고안했다. 에스더쉬퍼 서울의 김선일 디렉터는 “인간과 관련된 모든 배경을 금박으로 덮음으로써 동물의 해방을 표현하고자 했다”고 작품의 의미를 설명했다.

에티엔 샴보 ‘언테임드’ 연작(사진=에스더쉬퍼 서울).
독일의 명문화랑 에스더쉬퍼가 프랑스 아티스트 에티엔 샴보(43)의 개인전 ‘프리즘 프리즌’(Prism Prison)을 3월 9일까지 서울서 개최한다. 에티엔 샴보는 2022년 프랑스 릴메트로폴 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여는 등 유럽 미술계에서 주목받고 있는 작가다. 그는 예술의 정의, 작품의 개념화와 창작의 방식, 전시의 형태·기능, 그리고 역사에 대한 개념을 위태롭게 뒤흔드는 작업을 해왔다.

전시 제목은 빛의 궤적과 스펙트럼의 분절을 나타내는 프리즘(prism)과 개인 또는 사회 집단의 감금을 상징하는 감옥(prison)의 연결성을 의미한다. 에티엔 샴보는 “이번 전시를 통해 제약과 통제에 대해 깊이 성찰하고 광학, 기하학, 동물의 신체, 정치 등 다양한 대상에 대한 해방의 방식을 고민했다”고 말했다.

에티엔 샴보 ‘지브로이드’ 연작(사진=에스더쉬퍼 서울).
가장 눈길을 끄는 건 ‘언테임드’ 연작이다. 기존의 이콘화(종교화)에 금박을 씌워 이미지를 변형한 작품이다. 이콘화의 특징인 금박 배경의 범위를 확장해 화면에 등장하는 동물의 몸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을 모두 지웠다. 작품에 등장하는 말, 당나귀, 소, 양 등 동물들은 길들지 않은 채 다른 세상을 부유하는 듯한 모습이다.

3층 전시실 바닥에 놓인 동물 형상의 청동 조각 작품들은 또 다른 분절의 과정을 드러낸다. 19세기 사실주의 말 조각들을 참조한 ‘지브로이드’(Zebroid) 연작은 말의 몸을 조각내고, 접고, 재조합하는 과정을 거쳐 탄생했다. 줄무늬를 닮은 절단 면의 형태가 인간이 길들일 수 없다는 야생 얼룩말을 연상케 한다. ‘지브로이드’는 얼룩말과 다른 말속 동물 사이에서 태어난 교잡종을 일컫는 용어다. 작품이 ‘분절된 파편들’과 ‘온전한 한 마리의 말’ 사이 모호한 영역의 형상이라는 점에서 어느 쪽에도 귀속되지 않는 새로운 동물인 지브로이드와 닮았다고 생각해 지어낸 제목이다.

에티엔 샴보의 네온 설치 작품 ‘이레이저’(사진=에스더쉬퍼 서울).
건물 1층에 위치한 더 윈도우 공간에서는 빛을 내뿜는 네온 설치 작품 ‘이레이저’(Erasure)를 만나볼 수 있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도 역설적 의미를 전달한다. 작품이 전시 공간을 삭제하는 ‘글자X’의 형태를 취하면서도 동시에 내부를 밝게 비추는 빛을 제공하기 때문이다. 공간 안쪽 바닥에는 누군가가 벗어 놓고 간 듯한 양말 한 켤레가 놓여 있다. 자세히 보면 청동 조각 작품으로 작품명은 ‘토포스’(Topos)다. ‘토포스’는 본래 장소를 뜻하는 그리스어로 몇 개의 모티프들이 자주 반복되면서 이루어내는 고정형이나 진부한 문구를 지칭한다. 이 작품에서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을 연상할지, 접히고 뒤집힌 형태를 보고 복잡한 수학공식을 떠올릴지는 오롯이 관람객의 몫이다.

불이 꺼진 공간인 2층 전시장에 ‘언테임드’ 연작이 설치돼 있다(사진=에스더쉬퍼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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