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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일리가 만났습니다]"속도조절 중요한데 코디네이션 기능 부재"

권소현 기자I 2019.01.29 05:00:01
권재민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 한국대표가 22일 서울 중구 S&P 한국지점에서 이데일리와 인터뷰를 갖고 있다. [사진=이데일리 신태현 기자]


[이데일리 권소현 기자] “저는 양방보다 한방의학을 더 좋아해요. 수술해서 도려내다 보면 많은 것들이 다칩니다. 근본적인 문제를 파악해서 서서히 고쳐야지 너무 한번에 고치려고 하다 보면 탈이 나기 마련입니다”

지난 22일 서울 중구 서울파이낸스센터에서 만난 권재민 S&P 글로벌 신용평가 한국 대표에게 스튜어드십 코드(기관투자가 주주권 행사 지침)에 대한 질문을 던지자 의외의 답이 돌아왔다. 국제신용평가사에 오랜 기간 몸담아온 만큼 선진국에서는 이미 보편화된 스튜어드십 코드가 국내에서도 빨리 정착돼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일 것으로 기대했지만 반대였다. 권 대표는 “좀 더 컨센서스를 바탕으로 제도적 보완을 통해 자연스럽게 기관투자자들이 의결권을 행사하도록 유인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말했다.

스튜어드십코드 뿐만이 아니다. 한국은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는데 있어서 너무 급하다는 게 권 대표의 생각이다. 한국 사람들의 급한 성격, 이로 인한 과속 정책을 바꿔야 할 대상으로 꼽았다. 그는 과속 페달을 밟기 보다 조율해가면서 사회적 합의를 기반으로 단계적으로 추진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과속정책 고속성장할 때나 효과…코디네이션 기능 강화해야

대표적인 과속정책이 바로 주52시간이나 최저임금이다. 권 대표는 “어차피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방향성이 틀렸다고 할 수는 없는데 속도가 너무 빠르다”며 “사실 누구를 따라잡는 데에는 급한 성격이 효과를 발하지만 1등에 오른 이후에 그 자리를 유지하는 데에는 도움이 안된다”고 지적했다. 1등으로 올라서면 남을 빨리 따라가야 할 때와는 다른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권 대표는 “썩어가는 것을 그냥 내버려뒀다가 한 방에 해결하려 하면 시원하기는 하지만 사회나 경제도 유기체 같은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지 않은 곳에서 위축이 올 수 있다”며 “장기적으로 천천히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경제정책을 조율하는 코디네이션 기능이 마비됐다는 것이 문제라고 꼬집었다. 곳곳에서 과속정책을 추진하는데 이를 조율하고 조절할 컨트롤타워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에 좀 더 중도가 많아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코디네이션 기능이라는 것이 천재적인 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극단으로 치닫는 사회에서 중도인 이들의 여론이 모이면 그 힘으로 코디네이션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권 대표는 “정치적으로 중도뿐 아니라 소득에서도 중산층이 확대돼야 하고 기업에서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중견기업이 성장해서 버퍼역할을 해줘야 한다”며 “길게 보면 중간 계층이 커져야 사회가 건강해진다”고 설명했다.

◇한국 경제 모멘텀이 싸늘하게 식어간다

S&P는 올해 한국의 경제성장률을 2.5%로 보고 있다. 지난해 한국 경제는 2.7% 성장하는데 그쳐 6년 만에 최저를 기록했지만 올해에는 이보다 더 둔화할 것이란 전망이다.

권 대표는 “사실 2.5%면 선진국과 비교해 나쁘지 않은 편”이라면서도 “중요한 것은 트렌드”라고 말했다. 2017년에는 경기가 괜찮아지니까 성장률 전망치를 쫓아가면서 올렸고 이는 2018년 초반까지도 이어졌다. 하지만 작년 7월부터 경기둔화 조짐이 시작되자 정체상태를 보였고 최근 들어서는 시간이 갈수록 전망 하향조정이 이뤄지고 있다. 권 대표는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다 비슷한 상황”이라며 “올해 경기전망이 더 나빠지고 있어서 갈수록 전망치는 더 떨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경제성장률 전망치 변동추이[자료=S&P글로벌신용평가]


그는 한국의 수출의존도가 높고 원화는 경화(hard currency)가 아니기 때문에 태생적으로 한계를 갖고 있는 경제구조라고 설명했다. 국가나 기업의 펀더멘털과 상관없이 금리변화나 환율에 따라 영업이익이 크게 엇갈리는 것도 이 때문이다.

권 대표는 “경기가 전 세계적으로 식어가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생산과잉으로 먹고 사는 나라기 때문에 글로벌 경기 둔화에 따른 영향을 상대적으로 더 받는다”며 “특히 미·중 무역분쟁에 따른 영향을 실질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받을 수밖에 없는 나라”라고 말했다.

이처럼 글로벌 경기에 대한 노출이 큰 나라기 때문에 둔화하는 추세는 분명하다는 것이다. 권 대표는 “경기 모멘텀을 보면 걱정스러울 정도로 싸늘하게 식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진단했다.

그가 가장 큰 문제로 꼽는 것은 고용이다. 가계부채도 한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지만 이를 해결하려면 일단 일자리가 늘고 모두의 소득이 증가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자리 사정이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권 대표는 “고용은 수출, 제조업 경쟁력과 관련이 있는데 펀더멘털상 제조업의 경쟁력이 예전같지 않다”며 “고용유연성도 떨어지고 기업 지배구조 문제도 누적돼 있어 중국보다 가성비는 떨어지고 일본은 따라가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이렇게 갈수록 경쟁력이 떨어지는 가운데 주 52시간이나 최저임금까지 겹치니 경기가 더 식고 있다”며 “최저임금 등이 핵심 이슈는 아니지만 실질적으로 고용에 도움이 안 되는 게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글로벌 기업 탄생할 토양 마련해야

권 대표는 새로운 성장모델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동안 우리 경제를 떠받쳤던 반도체가 꺾이기 시작하자 곳곳에서 경고음이 들리고 있다. 반도체 뒤를 이어 한국 경제를 이끌 산업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다음 먹을거리를 찾지 못한 것은 한국 발전모델의 한계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기초기술은 부족한데 엘리트 관료들이 중점 육성 산업을 선정해 밀어주고 금융기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성장한 대기업이 지금까지 한국 경제를 떠받쳤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소기업이나 근로자의 희생도 수반됐다. 사실 이같은 경제 성장 구조는 이미 무너졌고 지금까지는 탄성으로 버텨왔다는 게 권 대표의 평가다.

앞으로는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나와서 새로운 산업으로 연결되고 스타트업이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는 순환구조를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권 대표는 “중국에서는 알리바바, 텐센트 같은 기업이 나오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이같은 기업이 탄생할만한 경제구조의 변화가 없었다”며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들도 기업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상품이나 서비스를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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