핵보유 욕심 70년 역사…北, 7차 핵실험으로 무기화 완성하나

김관용 기자I 2022.11.03 05:05:00

北은 소련 지원받아 영변 핵시설 구축 및 인재 양성
NPT 가입 후에도 핵 개발을 지속해 핵위기 초래
1~6차 핵실험 통해 핵무기화 검증, 7차 실험도 준비 끝
다양한 운반수단에 탑재할 수 있는 핵 소형화 검증할 듯

[이데일리 김관용 기자] 북한의 핵무기 보유 욕심은 6·25전쟁 당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56년 소련의 ‘두브나 핵연구소’에 핵 물리학자를 파견한 북한은 그 이전부터 핵 보유를 구상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은 냉전 체제 당시 우방국이었던 소련과 원자력을 핵무기가 아닌 에너지원으로 개발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기술을 이전받는다.

이후 1962년 영변에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하고 김일성 대학 등에 원자력학과를 신설했다. 소련으로부터 2MW급 연구용 원자로를 도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1980년대 영변 핵시설 단지 건립을 본격화 한다. 이에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의심한 소련은 북한에 핵무기확산방지 관련 국제조약인 NPT 가입을 종용한다. 이에 따라 북한은 1985년 12월 NPT에 가입하게 된다.

문제는 NPT 가입 당사국은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검열을 받아야 하는데 북한이 신고한 것과 사찰 결과 간 일치하지 않은 점이 발견된 것이다. 이에 따라 IAEA측은 문제의 영변 핵시설에 대한 특별사찰을 요구했는데, 북한은 이를 거부하고 1993년 3월 NPT 탈퇴를 선언했다. 국제사회의 각종 대북제재가 뒤따랐다.

이에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은 김일성 주석과 회담을 갖고 ‘제네바 합의’를 체결했다. 북한이 IAEA 의무를 전면 이행하는 대신 대북 제재조치를 푸는 게 핵심이었다. 하지만 북한은 1998년 인공위성을 위장한 대포동 미사일(핵무기 운반체제)을 발사함으로써 핵 개발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았다.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지난 2016년 3월 공개한 장면으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핵탄두 기폭장치 추정 물체 앞에서 핵무기 연구 부문 과학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2002년 미국 특사가 방북했지만 북한이 고농축 우라늄 개발 사실을 인정하면서 결국 북한의 핵 개발 사실은 수면 위로 드러났다. 핵동결 해제를 선언한 북한은 결국 2003년 1월 NPT를 탈퇴하고 핵무기 개발을 본격화한다.

남북한과 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 등이 참여하는 ‘6자회담’을 통해 북핵 문제 해결 의지를 보였지만 사실상 유야무야됐다. 이후 북한은 2006년 제1차 핵실험을 감행한 이후 2009년 2차, 2013년 3차, 2016년 4·5차, 2917년 6차 핵실험을 했다. 이를 통해 폭발력이 낮은 핵탄두부터 폭발력이 높은 수소 폭탄급까지 단계적으로 핵무기를 진화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이 현재 7차 핵실험 준비를 마친 것으로 정보당국은 판단하고 있다. 북한은 이를 통해 소형화, 경량화한 전술 핵무기 실험을 할 가능성이 크다. 북한은 최근 다양한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발사하고 있는 상황이다. 신승기 한국국방연구원 연구위원은 “실전에서 사용될 수 있는 무기 실험으로 폭발력의 크기 여부와 상관없이 한국과 미국에 위협적인 실험이 될 수 있다”고 언급했다.

계속되는 北 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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