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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로기판·집어등…죽어가는 것에서 '심장'을 꺼내다

오현주 기자I 2018.04.16 00:12:00

배수영 '치유와 상생' 전 & 부지현 '궁극공간' 전
컴퓨터등 수명 다한 회로기판 활용
인간관계 위한 회로도 '순환' 표현
쓰임 다한뒤 버려진 집어등 가져와
칠흑같은 공간 붉은빛·연기로 채워

배수영의 설치작품 ‘생+생+생’(재생+소생+상생·2018·위). 가로세로 480×184㎝에 달하는 대작이다. 회로기판을 달고 회로도패턴을 심어 태양을 둘러싼 우주형상을 표현했다. 부지현의 ‘궁극공간’(2018·아래). 난간의 계단을 잡고 움직여야 할 만큼 칠흑같은 어둠뿐인 66㎡(약 20평) 남짓한 공간에 집어등을 달고 붉은 레이저빛과 연기를 채웠다(사진=갤러리박영·아라리오뮤지엄)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장면 하나. 하얀 벽에 깔끔한 판이 걸렸다. 그 안에 멀리서 봐도 한눈에 들어오는 정물이 자리잡고 있다. 나비니 새니 사과니 하트니 하는. 이 모두를 한 데 모은 듯한 커다란 작품도 보인다. 얼추 5m는 되는 듯하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유난스러울 게 없는 상황. 한 걸음 다가서면 시선을 사로잡는 세상과 비교하면 말이다. 흔하디흔한 나비·새·사과·하트 등이 품은 특별한 ‘심장’이 보이는 거다. ‘회로기판’이란 심장. 그러고 보니 그들의 속살도 얽히고설킨 수많은 회로였다.

#장면 둘.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검은 공간. 숨소리도 부담스러운 칠흑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서서히 시야에 꽂히는 붉은 등과 붉은 면이 보인다. 위아래로 천천히 움직이는 등과 빛을 따라 뭉쳤다 흩어지는 연기. 화염이란 게 이런 건가. 아니 어둠에 숨죽였다가 햇빛을 받으면 퍼지는 안개란 게 이런 건가. 외부의 빛, 공기까지 철저히 차단한 깊디깊은 사각방이 시공간감각을 정지시킨다. 다만 한 가지. 이들을 여전히 살아있게 하는 ‘심장’이 느껴진다. ‘집어등’이란 심장.

설치작가 배수영(45)과 부지현(39)이 특유의 개성과 철학을 담은 개인전을 열고 있다. 배 작가는 서울 강남구 삼성동 트레이드타워 아트라운지에 ‘치유와 상생’ 전을, 부 작가는 종로구 안국동 아라리오뮤지엄 인 스페이스(옛 공간사옥)에 ‘궁극공간’ 전을 펼쳤다.

두 전시에서 눈여겨볼 것은 오브제와 작업방식이다. 두 작가 모두 소임을 다한 ‘폐물’에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해낸 것이다. 배 작가는 컴퓨터는 물론 각종 전자기기에서 쓰임을 다한 ‘회로기판’을 끄집어냈다. 부 작가는 고독한 밤바다에서 어부들이 고기를 잡는 데 쓰다가 버린 ‘집어등’을 가져다 놨다. 그러곤 둘 다 미술영역에서 벗어나는 ‘딴짓’을 서슴지 않았다. 전기니 전자니 온갖 ‘공학’적 요소를 총동원한 작품을 만들어낸 거다. 그렇게 배 작가는 인공과 자연, 인간이 상생하는 순환의 길을 냈고, 부 작가는 현실과 초현실이 접목하는 ‘제3의 공간’으로 향하는 방을 냈다.

▲회로기판은 순환이다…배수영의 ‘관계의 재생’

“결국 사는 일은 생명의 순환이고 관계의 회복이 아닐까 한다. 회로로 연결해 뽑아낸 인공적인 빛이란 것도 인간을 둘러싼 자연관을 되살리고 조합한 거니까.”

가로세로 480×184㎝에 달하는 설치작품 ‘생+생+생’(재생+소생+상생·2018)을 가리키는 배 작가의 생각이 꽤 복잡해 보인다. 태양을 둘러싼 우주의 형상이라니 왜 아니겠나. 마치 작품에 얽어놓은 수많은 회로기판의 연결성을 머리 안에 다 들여놓은 듯할 거다.

배 작가의 작품세계는 한 마디로 이런 거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소멸하는 동시에 다시 태어난다.’ 결국 그 순환에서 치유하지 못할 게 없고 상생하지 못할 게 없다는 것이다. 이를 드러낸 가장 극적인 장치가 회로도인 거고.

배수영의 ‘마인드’(2015). 회로도패턴을 이용해 몸통을 만들고 쓰임이 다한 회로기판에 스와로브스키 스톤을 붙여 하트를 형상화했다. 기계를 덧붙인 심장의 비애를 내보인 듯하다(사진=갤러리박영).


이미 1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공공미술작업을 주로 하며 글로벌 아티스트란 이름을 얻기 전부터 배 작가는 필요에 따라 만들어졌으나 끝내 가차없이 버려지는 산업폐기물에 눈을 돌렸다. 환경에 대한 관심이었고, 자연에 대한 관심이었으며, 더 구체적으로는 사람에 대한 관심이었다. 그렇다고 거창한 내용물을 끌어댄 것도 아니다. 물과 빛, 녹색식물에서 시작해 페트병으로 옮겨가더니 이내 회로기판에 다다랐다.

작품마다 등장하는 회로기판, 거기에 붙은 칩, 하다못해 USB까지 크고 작은 전자부속품은 이젠 그이의 주제가 됐다. 하지만 이 역시 기계를 향한 마음이라기보다 환경과 자연, 인간에 대한 배려로 봐야 한다. 배 작가는 “단순히 작품을 꾸민 게 아닌 ‘인간관계를 위한 회로도’를 만든 작업”으로 설명한다.

배수영의 ‘이브와 아담 3’(2015). ‘이브와 아담’ 연작은 컴퓨터 회로도·부속품을 활용하면서 시도한 작가의 초기작이다(사진=갤러리박영).


작업량이 많아지면서 회로기판을 구하는 일도 단순치 않게 됐다. 예전엔 용산 전자상가를 뒤져 공수했단다. 그조차 한계에 봉착할 무렵 조력자가 생겼다. 소방기 센서를 만드는 회사에서 협찬에 나선 거다. 한 달에 많을 땐 100여개. 그것을 뜯고 붙이는 고된 노동을 통해 ‘아는 것’도 늘어갔다. 역할이 많아질수록 회로기판에 붙는 장식도 많아진다는 것,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란 것, 뒤에 숨긴 하나라도 단절되면 기능은 끝나버린다는 것.

이번 전시는 갤러리박영이 배 작가를 전시작가로 내세워 응모한 ‘트레이드타워 아트라운지 사업’에 선정되며 성사됐다. ‘생+생+생’을 비롯해 시간에 따라 색을 갈아입는 ‘나비’(2018)와 ‘무술’(2018), 두 개의 사과 사이를 나비가 떠도는 ‘이브와 아담 3’(2015), 비상하는 새의 형상을 딴 ‘굿뉴스’(2015), 기계를 덧붙인 심장의 비애를 내보인 듯한 ‘마인드’(2015) 등 7점을 걸었다. 폐기와 재생, 삶과 죽음 또 생명, 이보다 더 지독한 생태미학이 또 있을까 싶다. 전시는 7월 31일까지.

작가 배수영이 서울 강남구 삼성동 트레이드타워 아트라운지에 꾸민 ‘치유와 상생’ 전에서 자신의 작품인 ‘무술’(2018)과 ‘나비’(2018) 사이에 섰다. LED를 장치한 두 작품은 시시각각 색의 변화를 내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집어등에 돌려준 바다…부지현의 ‘문명의 재생’

“실제로 사용했던 거다. 소용을 다해 버린 것을 가져왔다. 처음에는 판박이처럼 똑같았지만 버려질 땐 똑같은 것이 하나도 없더라.”

집어등 얘기다. 도시에 산다면 입에 한 번 올리기도 힘든 물건, 어두운 바다로 작업에 나선 어부들이 물고기를 모을 목적으로 배에 매달아둔 등불 말이다. 그 집어등이 서울 한복판 지하방에 생명 같은 빛을 부른다. ‘궁극공간’으로.

부 작가는 제주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그이에게 트레이드마크가 된 집어등도 바다배경의 고향이 아니었다면 찾지 못했을 터. 어느 날 문득 눈에 들어온 그때부터였다. 작업을 마치고 돌아온 어부를 조르고, 부두를 헤매며 집어등 수거에 나선 것은. 이미 폐기처분에 다다른 집어등의 운명이 각별했다.

부지현의 ‘궁극공간’(2018). 20분으로 세팅한 프로그램 중 한 장면이다. 몇 개의 집어등이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는 사이 붉은 레이저빛 사이로 뿜어나온 연기가 칠흑같이 어둠을 덮치고 있다(사진=아라리오뮤지엄).


난간의 계단을 잡고 움직여야 할 만큼 ‘뵈는 게 없는’ 66㎡(약 20평) 남짓한 공간. 굳이 눈에 보이는 장치를 꼽으라면 몇 개의 집어등과 이들을 연결한 얇은 와이어가 전부다. 그런데 묘한 일이다. 그 안을 가득 채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장치가 이토록 강렬하니. 규칙적으로 연기를 내뿜는 소리에 기다렸다는 듯 붉은 레이저빛, 그와 섞인 안개층이 관람객을 휘감는다.

전시장은 1977년부터 1992년까지 공간사랑이란 소극장으로 쓰던 곳.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이 설계한 옛 공간사옥에 속한 지하층이다. 지금은 아라리오뮤지엄이 전시공간으로 사용한다. 김수근은 공간사옥을 3가지로 구분했는데. 생존을 위한 ‘제1공간’, 경제활동을 위한 ‘제2공간’, 창작과 명상을 위한 ‘제3공간’이 그것이다. 그중 부 작가가 ‘궁극공간’으로 삼은 바로 그곳이 김수근의 ‘제3공간’인 소극장인 거다. 덕분에 왜 온통 붉은 색이어야 했나에 대한 설명도 가능했다. “붉은 벽돌로 쌓은 건물과 썩 어울릴 거라고 판단했을 뿐이다.”

부지현의 ‘궁극공간’(2018). 20분으로 세팅한 프로그램 중 한 장면이다. 연기가 걷힌 검은 공간에 몇 개의 집어등과 붉은 레이저빛이 그어낸 선만 보인다. 마치 물이 찬 듯한 착시현상을 불러일으키는 바닥이 보인다(사진=아라리오뮤지엄).


작품에 세팅했다는 20분짜리 프로그램의 처음과 끝을 가늠하긴 쉽지 않다. 극한의 어둠 속에선 산술적으로 잴 수 없는 시간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치밀한 계산법을 동원했단다. 연기의 양, 빛의 움직임을 따졌고, 집어등이 바닥을 치고 일정 높이까지 올라가는 간격을 초단위로 쟀단다. 그렇게 꾸민 장소에 마치 관람객을 방치하듯 던져놓지만 부 작가가 애써 강조한 게 있다. ‘눈높이’다. 입구에 달린 발코니에 섰는지, 물이 찬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바닥에 섰는지, 그 바닥에 앉았는지 누웠는지에 따라 다른 장면을 만날 수 있는 거다.

이번 전시에 부 작가는 딱 한 점 ‘궁극공간’을 냈다. 명상시간도 좋고 휴식공간도 좋지만, 폐집어등에게 고향 밤바다를 돌려주려 한 진한 복선이 먼저 보인다. 전시는 5월 13일까지.

작가 부지현. 뒤쪽으로 작가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폐집어등이 보인다. 제주출신 작가는 소용이 다한 집어등을 직접 수거한다고 했다(사진=아라리오뮤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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