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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희순 "가슴에 한(恨)이 많아서…" 그의 연기엔 한(限)이 없다

조선일보 기자I 2009.02.03 08:51:30
[조선일보 제공] 이 남자와 이야기하면 피로가 금세 풀릴 줄 알았다. 느물느물한 말투로 사람들에게 엉겨 붙거나, 한참 심각한 순간에도 능글맞게 농담을 툭 던지는 게 스크린 속 박희순(39)의 전형적인 모습 아닌가. 연극계의 거목 오태석 밑에서 12년간 무대에 오르며 닦았던 연기 실력은 영화로 무대를 옮긴 뒤에도 여전히 반짝였다. 고심해서 묻지 않아도 2박 3일은 들어야 할 얘기를 술술 풀어낼 것 같았다. 그런데 웬걸.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이 사내에게서 여러 문장으로 된 대화를 이끌어 내는 건 그리 쉽지 않았다.

"낯가림이 심해서 그래요. 낯선 사람 있으면 술자리에서도 서너 시간 동안 말 한마디 안 한 적도 있어요. 사람들이 나한테 집중하는 게 너무 싫어요. 난 그냥 조용히 있고 싶은데 '무슨 안 좋은 일 있냐'며 물어보고 관심 주는 게 싫어요. 그냥 내버려뒀으면 좋겠어요."

보통 연예인들은 "제가 낯을 가려서"라는 말을, 마치 "제가 노는 애가 아니라서"라는 뜻과 동의어로 받아들여지길 바라며 얘기하곤 하지만, 박희순은 그런 사람들과는 달라 보였다. "기분이 안 좋을 때는 며칠이고 말을 안 해요. 어릴 때도 비슷했죠. 발표도 못하고,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그런 아이요."

존재감 없던 그 아이도 변할 때가 있었다. 바로 무대 위에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할 때가 바로 연기를 하고 있을 때다. "연기는 '가면'이라고 생각해요. 낯도 가리고 소극적인 성격인데, 가면을 썼다고 생각하면 자유로워져요. 마음도 무척 편해지고요."

'세븐데이즈'의 성공에 이어 '헨젤과 그레텔' '나의 친구, 그의 아내' 등을 거치며 형사·조폭·요리사· 소시민 등으로 다양하게 변신했던 그는 이번 영화 '작전'(12일 개봉)에서 또 한 번의 가면을 썼다. 그가 맡은 역할은 금융업으로 전업한 전직 조폭 황종구. 백수 현수(박용하)와 자산관리사 서연(김민정) 등을 이끌며 주가 조작 '작전'을 꾸민다. "처음엔 무식한 조폭 캐릭터였어요. 뻔하디 뻔했죠. '오션스 일레븐'의 조지 클루니 같은 인텔리 분위기가 아니면 안 하겠다고 했어요. 새롭지 않으면 도전할 의미가 없었으니까요."

아무리 무대가 좋다고는 하지만 그의 말대로 그건 가면일 뿐, 진짜 박희순은 아니다. 가짜로 사는 게 더 행복하다는 게 가능할까. 인터뷰하는 순간조차 설정이 아닐까. "무대에선 다르게 살 수 있잖아요. 제가 한(恨)이 많아서 그래요. 그동안 힘들게 자랐으니까. 참고 참고, 또 참는 스타일이거든요. 극단에서 막내 생활을 오래하다 보니 더 몸에 밴 것 같고. 거긴 규율도 심했고, 나대는 거 안 좋아했으니까요. 선배들 밑에서 제대로 한마디 못하고, 술자리에서도 남들 뒤치다꺼리 다 했으니. 또 집안에선 '장남 콤플렉스'에도 시달렸던 것 같고. 반듯해야 하고 집안을 일으켜야 하고…."

일부러 그의 가면을 벗길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한(恨)'이란 단어를 뱉은 이후, 그의 입은 기다렸다는 듯이 움직였으니까. '연기 교과서'로 불리는 그의 진정성의 원천은 어떤 연기 매뉴얼에서 비롯된 게 아니다. 그의 폭발력 있는 연기는 그의 인생 그 자체였다. 그는 가면이라고 말했지만, 그게 진짜 박희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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