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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희와 함께 하는 한국의 섬] 섬시인과 함께 떠난 신안 우이도

심보배 기자I 2019.05.13 14:14:01

섬여행 신안 우이도
‘섬총사’ 촬영지
성촌해수욕장 비단조개
문순득 생가

[이데일리 트립in 이승희 기자] 목포에서 세 시간 반/우이도 돈목/갔다 오면 다시 가고 싶은 곳/다시 가도 외로움은 여전히 남아 있고/발자국은 이미 지워지고 없는 데/그 사람이 그리운 거 있잖아요(중략). 백마디 말보다 한 편의 시, 한 장의 사진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때가 있다. 대한민국 최고령 섬 여행가이자 섬시인 이생진 선생(91세)의 ‘우이도로 가야지’ 시집를 읽고, 우이도에 가고 싶었다. 2014년 8월의 일이다. 이후로 우이도는 언제나 다시 가보고 싶은 곳이 되었다.

어린이날 연휴 오전 11시 40분 목포연안여객선터미널에서 우이도행 섬사랑6호에 몸을 실었다. 배가 떠 있듯 내 마음도 떠 있었다. 목포에서 우이도는 흑산도 보다 가까운 거리지만, 시간상으로는 너무나 먼 곳이다. 하루에 한 번뿐인 배편과 철부선(차량과 사람을 함께 실을 수 있는 배)으로 세 시간 반이나 걸리는 머나먼 섬이다.

배 타는 것이 지루해질 때쯤 도초도를 지난다. 물살의 깊이와 거칠기가 사뭇 다른 외해로 빠져나간다. 뱃멀미의 시작점이다. 도초도에서 정서 쪽으로 가면 유명 관광지 흑산도와 홍도다. 쾌속선은 흑산도, 홍도를 향해 여행객을 실어 나르기 바쁘다. 빨리 가는 만큼 물살도 빨리 사라졌다. 우이도행 섬사랑6호는 남서쪽을 향해 간다. 느림보 여객선은 오랫동안 발자국을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배 안에서 10년 만에 고향을 방문한다는 분을 만났다. 우이도 진리마을에 우이초등학교 본교가 있었고, 우이도리에 6개의 분교가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사람이 많았다는 이야기다. 경치도를 마을 사람들은 ‘별치’라고 했다. 현재는 무인도지만 당시에는 2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경치도 옆으로 삼월도, 히섬이라 불렸던 백도, 이 섬은 멍섬, 저 섬은 솔섬 이런 섬 이야기를 나누웠다. 그는 우이도 진리항에 내렸다. 진리항을 빠져나와 우이도 부속섬 서소우도, 동소우도를 경유해서 종착지 우이도 돈목마을에 여행자를 내려 놓는다.

하루 전날 들어온 이생진 시인과 일행이 돈목선착장에 마중 나왔다. 돈목마을 어부 박화진과 한영단 부부가 운영하는 민박집에 짐을 풀고, 돈목해수욕장으로 나갔다. 해수욕장 끝으로 동양에서 최고 높다는 모래언덕이 보인다. 높이 50m, 경사면 길이 80m. 마을 사람들은 ‘산태’라고 부른다. 학술용어로는 ‘풍성 사구’라고 한다. ‘바람에 의해 형성된 모래언덕’이라는 뜻이다. 우이도 모래언덕은 태안 신두리 해안사구, 옹진 대청도 옥중동모래사막과 함께 국내 대표적인 풍성 사구 중의 한 곳이다.

돈목해수욕장을 따라 성촌마을로 갔다. 몇 년 전 방영했던 TV 프로그램 ‘섬총사’에서 강호동, 김희선이 숙박했던 마을이다. 성촌마을 뒤편으로 성촌해수욕장이 나온다. 해수욕장 끝으로 울릉도 송곳봉과 닮은 산이 보인다. 일행들은 성촌해수욕장에서 비단조개 캐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성촌해수욕장에서 모래언덕 뒤편으로 올라갔다. 출입이 허락하는 지점까지만 갔다. 국립공원공단에서는 훼손되는 모래언덕을 보호하기 위해 출입을 통제하고 있다. ‘돈목처녀 모래 서 말은 먹어야 시집간다.’라는 말이 있다. 바람에 날아온 모래는 섬마을 주민들에게 골칫덩이였다. 아이러니하게도 모래언덕은 빗물 저장창고 역할을 해주어 성촌마을과 돈목마을에 식수를 해결해 주었다. 모래언덕을 보기 위해 우이도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으니, 이제는 효자 노릇을 하는 셈이다.

모래언덕에는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가 전해진다. 성촌마을 처녀와 돈목마을 총각은 사랑에 빠졌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모래언덕에서 사랑을 나누었다. 어느 날 돈목마을 총각은 모래언덕에 나타나지 않았다. 돈목마을 총각이 고기 잡으러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에 목숨을 잃었다. 이 소식을 들은 성촌마을 처녀는 슬픔을 견디다 못해 바다에 뛰어들었다. 이후 성촌마을 처녀는 모래가 되고, 돈목마을 총각은 바람이 되어 이 모래언덕에서 다시 만나고 있다는 것이다.

돈목마을로 돌아오는 길에 탤런트 김희선이 숙소로 사용했던 성촌마을 민박집을 방문했다. 민박집 아주머니는 정겨움이 넘쳤다. 김희선이 잤던 방을 구경시켜 주었다. 남자 손님들에게 인기가 많단다. 나도 이 방에서 하룻밤 자고 싶었다. 탤런트 김희선은 종종 전화도 하고, 선물도 보내 준다고 자랑을 한다. 사람은 떠났어도 아주머니의 목소리에는 그리움이 가득했다.

돈목마을 민박집에는 푸짐한 밥상이 차려져 있다. 우이도 섬 밥상은 국내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만큼 음식으로 유명한 섬이다. 섬에서 나오는 자연산 나물과 해산물로 차려진 밥상이다. 산이 깊고, 바다가 좋아 식재료가 풍부하므로 가능했다. 저녁식사가 끝나자 이생진 시인의 단골집 양평댁이 운영하는 민박집 마당에서 섬마을 콘서트가 열렸다. 돈목마을에 온 여행객들이 많이 모였다. 섬여행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시인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시인은 1988년부터 시작된 우이도와의 인연을 이야기해주었다. 양평 댁 아주머니는 우이도로 시집온 사연을 이야기해준다. 부부는 친구의 소개로 광화문에서 만났다. 남편이 얼마나 좋았는지 신안 우이도를 서울 우이동으로 들었다고 한다. 한바탕 웃음이 터졌다. 전국에서 모인 여행객들의 시 낭송과 장기자랑으로 우이도의 밤은 오랫동안 잠이 들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여객선을 타고 돈목마을에서 진리마을로 갔다. 우이도에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도로가 없다. 산을 넘거나 배를 타야 이웃 마을에 갈 수 있다. 왕복 산행을 피하려고 배를 이용했다. 진리마을 입구에는 ‘홍어장수 문순득’ 동상이 일행을 맞이해 준다. 우이도를 상징하는 조형물이다.

진리마을 입구에는 1745년(영조 21년)에 조성된 선창이 있다. 선창은 배를 정박하고, 수리하는 곳을 말한다. 수백 년이 지났지만, 선창은 원형 그대로 잘 보존되어 있다. 배를 묶을 수 있는 ‘계선주’가 보인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선착장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큰 곳이다.

마을 초입에 ‘박씨열녀지각’이라고 쓰인 열녀 상이 보인다. 열녀비는 많이 보았지만 열녀 상은 처음 본다. 열녀 상이 미사포를 쓴 마리아 같다. 천주교 신자였던 정약전 선생은 흑산도와 우이도를 오가며 유배생활을 했다. 정약전 선생이 생의 마지막을 보냈던 우이도. 그의 세계관이 고스란히 섬마을 사람들에 남아 있는 게 아닐까. 그래서 열녀 상에도 천주 사상이 반영된 것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진리마을 안에 있는 ‘표해시말’의 주인공 문순득의 생가를 찾았다. 우이도에서 유배 생활을 했던 정약전 선생이 문순득의 표류 이야기를 듣고 기록해 놓았던 것을 정약용의 제자이자 고산 윤선도의 사위인 이강회가 우이도에 들어와 유암총서에 수록한 것이 ‘표해시말’이다. 문순득의 표해시말은 3년 2개월에 걸쳐 오키나와, 필리핀, 마카오, 중국을 거친 최장기간, 최장거리 표류기라는 점에 의미가 있다. 표해록은 문순득의 ‘표해시말’ 이외에 15세기 최부의 ‘표해록’, 제주 애월사람 장한철의 ‘표해록’, 이지항의 ‘표주록’, 최두찬의 ‘승사록’ 등이 있다.

문순득 생가에서 서쪽으로 200m 거리에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학서 ‘자산어보’의 저자로 알려진 정약전 선생 유배지가 있다. 여행객이 알아보기 쉽도록 ‘손암 정약전 유배지’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남양주시청 다산학습 동아리 여유당’에서 세워 놓은 것이다. 신유박해로 유배길에 오른 정 씨 형제는 1801년 11월 21일 나주 반남정에서 마지막 밤을 보낸다. 다음날 동생 정약용 선생은 강진으로, 형 정약전 선생은 흑산도로 유배를 떠난다.

흑산도에 유배 생활을 하던 정약전은 동생이 방면된다는 소식을 듣고, “아우가 나를 보려고 험한 바다를 건너게 할 수 없다. 내가 우이도에서 기다리겠다.”라고 첩과 두 아들을 데리고 흑산도 모래미를 떠났다. 이를 안 흑산도 모래미 사람들은 그를 놓아 주지 않았다. 그 이후 정약전은 우이도와 흑산도를 오가며 유배 생활을 했다. 이를 증명하듯 정약전 선생 유배지에서 서쪽으로 250m쯤 가면 ‘서당골’이라는 곳에 정약전 서당 터가 있다.

우이도는 조선 시대 ‘소흑산도’라고 했다. 흑산도에는 흑산진이 있고, 우이도에는 우이보가 있었다. 모두 흑산진 수군 관할이였다. 같은 관할 이기에 이동이 가능했을 것이다. 유배지는 수군진이 있는 곳에 설치 되었다. 수군이 유배자들을 감시했다. 유배의 역사와 수군의 역사가 결을 같이하는 이유다. 정약전은 1816년(순조 16년) 6월 6일 유배 생활 16년 만에 우이도에서 운명한다. 정약전은 동생 정약용이 보내온 상여에 실려 우이도를 떠났다. 다산은 어머니 해남윤씨의 선산이 있는 충주 모현정(충주시 금가면 하담리) 인근에 형님 정약전 선생을 모셨다. 1987년 한국 천주교의 발상지 경기도 광주 ‘천진암 성지’에 나주정씨 집안 묘를 이장하면서, 정약전 선생도 천진암 성지에 잠들어 있다.

진리마을 북서쪽 띠밭너머해수욕장에 갔다. 해수욕장 넘어가는 고개에 돌담을 쌓았다. 이 돌담을 ‘우실’이라고 한다. 모래나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이다. 마을 사람들은 ‘성담재’라고 한다. 진리몰랑과 대초리몰랑 두 고개를 넘어 돈목마을까지 갔다. 4km 거리다. ‘몰랑’은 고개를 뜻하는 이 지역 방언이다. 진리몰랑에서 우이도 최고봉 상산봉(361m)에 올랐다. 상산봉에 오르니 우이도 마을과 주변 섬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상산봉에는 통일신라 진성여왕때 최치원 선생이 중국으로 유학을 가다가 우이도에 들렸고, 이곳에서 바둑을 두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상산봉에서 진리몰랑으로 내려와 계속해서 돈목마을로 길을 잡는다. 울창한 대숲에 가려진 대초리 마을이 나온다. 대초리 마을은 보길도 부용동처럼 해변 산중이다. 지금은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이다. 사람은 떠나고 돌담과 집터만 남아 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은 대나무가 아이들의 웃음소리까지 삼켜 버렸다.

돈목마을에 도착하니, 기상예보에 없던 풍랑 예비특보가 내려진다. 어쩔 수 없이 일정을 앞당겨 우이도를 빠져나온다. 성촌처녀의 혼이 담긴 모래언덕을 지키려는 돈목총각의 심술이 아닐까. 여행객들은 바람 때문에 우이도에서 내쫓기듯 나와야했다. 돈목총각이 허락만 하면, 다시 가고 싶은 섬이 우이도다.

[여행 정보]

목포에서 우이도 가는 섬사랑6호는 하루에 한 번 운항 한다. 목포에서 우이도 들어가는 여객선은 오전 11:40분 출발, 요금은 13,300원. 우이도 돈목에서 목포로 나오는 여객선은 아침 7시 20분 출발, 요금은 12,100원.

우이도 여객선 운항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신안군청 문화관광’ 홈페이지 참고.

우이도에는 숙박과 식사를 함께 하는 민박집이 여러 곳 있다. 돈목마을에 다모아민박, 우이슈퍼민박. 성촌마을에 성촌민박 등이 있다. 숙박은 1박에 5만원, 식사는 한끼 8천원 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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