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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실 혁명’ 이룬 어제의 백수들

조선일보 기자I 2006.11.23 09:46:33

강해진 ''IMF 취업세대'' <하>한국경제 짊어질 대리·과장들

[조선일보 제공] IMF 위기때 바늘구멍 취업문을 뚫은 ‘IMF세대’(1998~2000년 대학 졸업세대)는 이제 한국 경제의 ‘허리’가 됐다.

취재팀이 대우건설·삼성SDI·하나은행·한진해운·㈜한화의 5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 1998~2000년 입사한 IMF세대는 1215명으로, 이 중 714명(59%)이 대리·과장이었다(대리 501명, 과장 213명). IMF 세대가 중간 관리자층의 주력 부대로 등장한 것이다.

이념에서 결별한 ‘포스트386’의 첫 세대. 이들이 진입하면서 기업 문화는 확 바뀌었다. 상명하복의 업무 방식이 쌍방향·수평형으로 바뀌었고, ‘취할 때까지 마신다’던 음주 문화는 뒤로 밀려났다. 이들 세대는 치열한 경쟁의식을 확산시키면서 자기 계발과 재테크를 기업내 최대의 화두로 끌어올렸다.

상명하복·회식강요 등 직장 문화도 바꿔
“선배들처럼 잘리지 말자” 경쟁력 키워
“정치엔 관심 없지만 부동산 失政 불만”


◆술자리 대신 게임과 영화

㈜한화 천안공장 생산부에 근무하는 정기철(32) 대리는 후배사원 5~6명과 함께 한 달에 3~4번 퇴근 후 들르는 곳이 있다. 회사 근처 PC방이다. 팀을 짜 2시간 동안 맥주 내기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벌인다. 선배 세대는 회식과 ‘술자리 군기(軍紀)’로 부하 직원을 다잡았지만, 정 대리는 게임을 통해 팀워크를 다지고 대화한다.

점심 시간도 바쁘다. 일주일에 3~4번은 후배들을 이끌고 다른 부서와 음료수 내기 농구시합을 하기 때문이다. 정 대리는 “우리 세대가 중간관리자가 되면서 조직내 의사결정 과정이 과거의 하향전달식에서 쌍방향으로 바뀌었다”고 했다.

강렬한 경쟁의식과 적극성으로 무장한 IMF세대는 연공서열과 상명하복의 한국형 기업문화를 뒤바꿔 놓았다. 종이 서류로 진행되던 회의 방식도 인터넷 첫 세대인 IMF세대가 들어오면서 파워포인트 등을 활용한 화상(畵像) 회의로 바뀌었다.

1998년 대우건설에 입사한 손영진(34) 대리는 “입사하자마자 40~50대 대선배들이 줄줄이 정리해고 당하는 것을 보면서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는 위기감이 더욱 커졌다”고 말했다.

같은 해 입사한 신연선(36) 대리는 “우리 입사 기수부터 영어공부며 각종 자격증 취득 등 자기계발을 하려는 노력이 본격화됐고, 그런 위기감이 선배들에게도 강하게 전달된 것 같다”고 했다.

IMF 당시 정리해고로 인력공백이 생긴 데다 2~3년간 신입사원 채용도 급감하면서 이들 세대는 주말 가릴 것 없이 일주일에 3~4번은 야근을 하며 실무를 익혔다. 회식 자리에선 침체된 회사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이 맡겨져 온갖 장기로 선배들을 위로했으며, 3년 가까이 후배 없는 막내로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우리가 회사를 바꿨다”

취재팀은 1998~2000년 대우건설·삼성SDI·하나은행·한진해운·㈜한화 등 5개 대기업에 입사한 대리·과장 94명을 대상으로 IMF 취업세대의 생각을 들어보았다.

‘본인이 소속된 입사 기수들이 들어와 바뀐 사내 분위기가 뭐냐’고 묻자, 응답자의 16%가 “자기계발 및 경쟁 의식이 확산됐다”고 답했다. 개인존중(15%), 강요하지 않는 회식문화(7%), 합리적인 일처리(4%) 등도 꼽혔다.

㈜한화 손모(33) 대리는 “회식도 윗세대들처럼 일방적으로 통보하는 것이 아니라 개별 사원의 스케줄을 모두 고려해 짠다”며 “입사 초만 해도 ‘죽을 때까지 마시자’는 분위기였는데, 요즘은 피자를 먹거나 영화를 보기도 한다”고 했다.

94명 중 51%는 스스로 회사의 ‘중요 인력’이라고 답할 만큼 자신감에 차 있었다. 회계법인에 다니는 최모(33) 과장은 “기업인수합병(M&A) 실무에서는 내가 없으면 회사가 안 돌아간다”며 자신있게 답했다.

◆이념보다는 재테크

IMF세대에게 정치는 관심 밖이었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응답자(46.8%)가 ‘관심이 많다’는 사람(10.6%)의 4배에 달했다. 이들의 주요 관심사는 재테크와 자녀 교육, 내집 마련 등 현실적인 생활이슈들이었다. 86%가 “현재 재테크를 하고 있다”고 답했고, 재태크 수단은 예금·주식·부동산 순으로 나타났다.

이들 중 37%는 부동산 거품, 내수경기 침체 등을 이유로 ‘제2의 IMF’가 올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설혹 ‘제2의 IMF’가 와도 “새로운 기회”라는 반응을 보였다.

한진해운에 다니는 김모 대리는 “동산과 부동산에 대한 분산 투자를 통해 제2의 재산증식 기회로 삼는 동시에 새로운 산업에 대한 기회를 포착해 제2의 인생 도약을 모색하겠다”고 했다. 9년 전 경험을 교훈 삼아 재테크 전략을 세우겠다는 의견이 다수였다.

◆“부동산 정책이 가장 큰 문제”

IMF세대는 정부 경제 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서민들 잘 살게 해주겠다고 해놓고 세금·공공요금 모두 끌어올리기만 했어요. 부동산값 잡는다고 큰소리 쳤지만, 주변 시세까지 끌어올렸고 점점 살기 힘들어집니다.”

대우건설 신모(36) 대리는 현 정부 경제정책에 대해 “매우 잘못하고 있다”며 최악의 점수를 줬다. 같은 회사 김모(35) 대리는 “샐러리맨은 아무리 열심히 저축해도 10년 안에 집 한 채 사는 것이 불가능해졌다”며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부동산 값이 가장 큰 문제라고 말했다.

94명의 대리·과장 중 67%는 현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해 ‘잘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잘하고 있다’는 응답자는 한 명도 없었다. 정부 정책의 문제점으로 부동산 정책 실패(35%)를 꼽았고, 일관성 없는 정부정책(30%), 과도한 세금정책(12%)이 뒤를 이었다.

◆전투력을 키워라

20대 초반 취업난을 겪고 있는 후배들에게 한마디를 부탁하자 이들의 공통된 대답은 “최대한 전투력을 키우라”는 것이었다. 삼성SDI의 김모(34) 대리는 “끊임없이 자기 스스로를 계발하고 값어치를 올리는 방법만이 ‘제2의 IMF’가 와도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라고 조언했다.

㈜한화 황모(35) 대리는 “취업 문제로 마음 고생만 하지 말고 기업이 자신을 모셔갈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단련시켜야 한다”며 “궂은일이나 하찮은 일도 앞으로 큰 일을 하기 위한 연단이라고 생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했다.

직장 동료들이 본 ‘IMF 세대’

선배의 평가 “생존본능 강하나 아이디어 약해”
후배의 평가 “잘 뭉치지만 너무 일에 매달려”


IMF 세대는 스스로가 경쟁력 있다고 여긴다. 그렇다면 다른 세대의 평가는 어떨까?
자산운용회사인 ㈜한국운용 김범석(49·76학번) 사장과 1998년 입사한 여준호(34·92학번) 과장, 올해 회사에 들어온 모세영(25·01학번)씨가 IMF 세대의 강점과 약점을 놓고 얘기 보따리를 풀었다.


▲ 여준호(왼쪽) 과장의 영어식 이름은 제리(Jerry)다. 만화‘톰과 제리’의 생쥐 제리처럼,IMF세대는 근성으로 힘든 시기를 버텼다. 여 과장과 김범석(가운데) 사장, 모세영(오른쪽)씨가 대담 도중 활짝 웃었다.
▲김 사장(IMF 이전세대)=IMF 세대는 근성이 있어요. 못하면 못하는 대로, 잘하면 잘하는 대로. 못해도 근성 있다는 것은 최소한 같은 실패를 두 번 하지는 않는다는 거죠. 살아남기 위한 의지가 강해요.

▲여 과장(IMF 세대)=제 입사동기가 9명인데 현재 6명 남아있으니 많이 나가지도 않은 편이죠. 우리끼리 잘 뭉치고. 그래서 일이 겹칠 때 업무조정도 잘 되는 편이에요.

▲모세영씨(IMF 이후세대)=과장님 연배의 선배들을 보면 우리보다 더 잘 뭉치는 것 같아요. 회식 자리에도 함께 잘 가세요.

▲김 사장=이 친구들은 능력을 인정받았다고도 할 수 있죠. 본점에도 많이 와 있거든요. 출근도 아침 7시30분~8시에 해서 빨리하는 편이고.

▲여 과장=저희들끼리 모이면 경쟁력을 갖춰야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저도 저녁에 영어학원에 다니고 있습니다.

▲김 사장=그런데 이 친구들은 생존본능은 강하지만 그 다음을 내다보는 능력은 부족해요. 영업은 잘하는데 아이디어가 좀 약하다는 얘기죠.

▲모세영씨=개성과 특징이 모자라는 것 같아요. 일에 대한 열정 때문이겠지만 주말에도 나와서 일을 많이 하는데, 자신만의 취미나 여가생활을 하는 분은 많이 보질 못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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