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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혹한에 아들네 집으로, 노인정으로 피신…달동네 겨울나기

황병서 기자I 2022.12.23 06:00:00

최악 한파 속 서울 달동네 '백사마을·개미마을' 가보니
웃풍 막으려 외벽 비닐로 감싸…냉골에 이불도 '역부족'
텅 빈 연탄창고에 '한숨'…불황에 코로나로 후원·봉사자↓
"기후변화, 에너지 취약계층에 가혹…사회 안전망 절실"

[이데일리 황병서 기자] “내년 봄이 오는 4월까지는 버텨야 할 텐데…올해는 추워도 너무 추워.”

서울의 마지막 남은 달동네로 불리는 서울 노원구 중계본동 ‘백사마을’에 한파로 인적이 드문 모습이다.(사진=황병서 기자)
서울 노원구 불암산 자락의 백사마을 2평(약 6.6㎡) 남짓한 좁은 방에서 사는 80대 여성 장모씨. 그는 방 한가운데 설치한 연탄난로와 전기장판 위 겹겹이 덧댄 이불로 추위를 이기고 있었다. 건물 외벽은 비닐로 둘러쌌지만, 웃풍과 함께 세찬 겨울바람 소리를 막기엔 역부족인 모습이었다. 연탄에 의지한 채 겨울을 나고 있다는 장씨는 “하루에 연탄 6장은 때야 하는데 부족해 난로를 계속 못 켜니까 겨울나기가 힘들다”며 “너무 추운 날이면 근처 아파트에 사는 아들이 걱정되는지 밤에 차로 데리러 온다”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른바 서울의 마지막 남은 ‘달동네’로 불리는 서울 노원구 중계본동 백사마을과 서대문구 홍제동 개미마을 주민 등 주거 취약계층엔 올해 혹한이 더욱 가혹하다. 잘 갖춰진 난방시스템 없이 오롯이 연탄난로에 의지한 채 추위와 싸우고 있었다. 올해 물가 급등에 생존을 위협당하고 있는 이들은 예년보다 더 심해진 한파에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서울 노원구 중계본동의 백사마을에서 2평(약 6.6㎡) 남짓한 좁은 방에서 사는 80대 여성 장모씨는 방 한가운데 설치한 연탄난로와 전기장판 위 겹겹이 덧댄 이불로 추위를 나고 있다.(사진=황병서 기자)
‘혹한기’ 추위와 싸움…“연탄에 의존하지만, 부족한 상황”

지난 20일 오전 10시께 서울 노원구 중계본동 104번지로 오르는 골목길. 한때 1200세대가 모여 살던 백사마을에는 10분의 1로 줄어든 120여세대만 남아 한적했다. 골목길 사이로 ‘공가(空家)’라고 써 붙인 안내문과 붉은색 글씨로 쓰여 있는 ‘철거’라는 글자만 눈에 띄었다. 마을에 남아 있는 낡은 집들은 집주인들이 재개발 사업으로 보수를 꺼려 임시방편으로 비닐로 외벽을 감싸 웃풍을 막으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두툼한 옷과 털모자 등을 입은 채 안방에서 된장국과 김치 등으로 아침 겸 점심을 해결하려던 70대 중반 여성 박모씨는 올해 추위가 유독 심하다고 토로했다. 실제 방바닥은 데워질 기미 없이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방 안이지만 하얀 입김이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왔다. 박씨는 “바닥에 일회용 돗자리를 덧대고 그 위에 얇은 이불을 올렸지만, 한기를 막 수 없다”며 “낮에는 밖으로 나가 볕을 쬐는 게 훨씬 따뜻하다”고 말했다.

에너지 취약계층의 대표적인 난방이 연탄이지만, 이마저도 부족해 혹한의 겨울을 나기가 쉽지 않은 실정이다. 실제 골목길을 따라 올라가 도착한 밥상공동체 복지재단의 서울연탄은행 연탄창고는 텅텅 비어 있었다. 이 창고 안에는 보통 3000~4000장 정도의 연탄이 들어가지만, 이날 기준 300장도 채 되지 않았다.

고물가에 경제사정이 팍팍한 탓인지 연탄 후원은 ‘반 토막’이 났다. 올해 연탄은행에 후원 된 연탄은 25만700장으로 전년(47만장)대비 47% 줄었다. 연탄을 나르는 봉사자 수도 감소했다. 올해 연탄봉사에 참여한 인원은 992명으로 전년(1498명) 대비 34% 줄었다. 실외 마스크 착용이 해제됐지만, 아직 코로나19 감염에 대한 염려로 단체봉사가 많이 줄어든 탓이다. 코로나19 발생 이전인 2019년과 비교하면 연탄 후원은 70%, 봉사자는 56% 급감했다.

서울연탄은행 관계자는 “경제 상황이 좋지 않다 보니 후원금이 적어 연탄을 구매하기가 어려운 상황”이라면서 “최근에는 연탄 가격이 오를 것이라는 소식도 들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서울 노원구 중계본동에 있는 밥상공동체 복지재단 서울연탄은행의 연탄창고에는 연탄이 최대 4000장이 들어가지만, 20일 기준 300장도 채 되지 않는 수준에 그쳐있었다.(사진=황병서 기자)
‘웃풍’에 ‘미끄럼’ 걱정도…전문가 “지자체 차원 긴급 지원도 필요”

서울의 대표적 달동네 중 하나인 서대문구 홍제동 개미마을도 상황은 비슷했다. 이곳에서 60년 넘게 살아온 80대 남성 이모씨는 “요즘 같은 추위는 드물다”며 “그나마 연탄보일러는 얼지 않아 다행이지만, 수돗물이 터질까 봐 조마조마하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이 동네 집들은 벽에 단열재를 제대로 넣지 않고 엉성하게 지어서 웃풍이 심하다”며 “추위를 피해 따뜻한 노인정으로 찾아간다”고 말했다.

슬레이트 지붕에 나무판자로 얼기설기 지어진 80대 남성 박모씨의 집은 냉기 탓에 온몸이 꽁꽁 어는 느낌이었다. 자식들에게 가끔 받는 용돈으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박씨는 “웃풍이 심해 비닐로 외벽을 둘러쳤지만 찬 바람에 얼굴이 시리다”며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 반주를 하는 날이 많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특히 언덕배기에 있는 개미마을 주민은 폭설이면 고립되기 일쑤다. 70대 남성 박모씨는 “버스가 오가는 큰 도로는 열선이 깔려서 괜찮지만, 좁다란 골목길은 눈이라도 많이 오면 살얼음에 낙상 위험이 크다”며 “동네에 노인들뿐이라 눈 올 때마다 염화칼슘을 뿌리는 것도 벅차다”고 하소연했다.

기후변화로 인한 충격은 에너지 취약계층에 가혹한 만큼 이들을 위한 사회적 안전망이 절실한 상황이다. 정재훈 서울여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긴급 지원 등 발 빠른 대응이 필요한 상황”이라며 “경기가 불황 속에서도 지역상공회의소 등 지역사회 차원의 모금이나 기부활동 움직임도 뒷받침돼야 한다”고 말했다. 전용호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도 “기후변화로 인한 충격은 에너지 취약계층이라 할 수 있는 달동네나 쪽방촌 주민에게 가혹할 수밖에 없다”며 “정부나 지자체가 이들에게 에너지 바우처를 확대 제공하고 단열재가 마련되지 않은 노후화된 거주시설의 수리 지원에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언덕배기에 있는 서울 서대문구 홍제동 개미마을에 폭설이 내린 후 한적한 모습이다.(사진=황병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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