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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R 아버지'가 말하는 가상과 현실

장병호 기자I 2019.01.02 05:04:00

가상 현실의 탄생
재런 러니어|536쪽|열린책들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가상현실(VR)은 이제 SF 소설이나 영화에서나 등장하는 낯선 단어가 아니다. 참전 군인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나 수술 연습용으로 쓰이기도 하고 드라마의 소재, 게임 등 일상에서도 자주 접할 수 있는 용어다.

그런데 VR의 정의가 무엇인지 묻는다면 선뜻 답하기 어렵다. 미국의 저명한 컴퓨터과학자로 ‘VR의 아버지’라 불리는 저자에게 묻는다면 뾰족한 답이 나올까 싶다. 그런데 꼭 그렇지도 않다. VR에 대한 저자의 정의가 엉뚱해서다. ‘디지털 장치에 적용되는 마술의 수법.’ ‘다른 장소, 다른 몸,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한 다른 논리의 환각을 만들어내는 오락용 제품.’ 심지어 이런 것도 있다. ‘아무리 흥미진진한 경험을 하고 있어도 외부인에게는 터무니없이 괴상하고 바보 같이 보인다.’

제목과 저자의 명성만 보고 VR 전문 이론서를 기대하며 책장을 넘긴다면 저자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중심인 내용에 당황스러울 것이다. 저자는 1984년 VR 스타트업인 VPL 리서치사를 설립하고 VR의 개념을 재정립하는 등 VR 연구의 선구자적인 역할을 해왔다. 그런 저자가 이처럼 엉뚱한 방식으로 VR에 대한 이야기를 쓴 이유가 있다. VR은 “이 세상의 주어진 상황에 얽매이지 않는 존재 양식”이기에 “VR 이야기를 객관적으로 서술하겠다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서다.

저자는 VR이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야기하려면 자신의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어린 시절인 1960년대 중엽부터 VPL을 떠난 1992년까지의 자신의 삶을 찬찬히 풀어쓴 이유다. 한 사람의 자전적 이야기지만 그 속에는 저자가 어떻게 VR에 관심을 가졌고 연구를 하게 됐고 그 결과가 무엇이었는지가 담겨 있다. 때로는 비현실적이고 특별하게 느껴지는 저자의 삶은 VR에 대해 “현실이 가상보다 더 가상적일 수 있다”고 하는 말을 새삼 떠올리게 만든다.

VR 전문가인 저자는 아이러니하게도 VR이 가져올 미래를 긍정하지도 부정하지도 않는다. 기술의 발전 가능성이란 측면에서는 장래가 기대되지만 VR로 현실이 오히려 인위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현상에 대해서는 우려를 표한다. 그래서 저자는 VR 시대에 우리가 만들어내야 할 것은 ‘사랑의 창조’라고 말한다. 현실세계에서 사람이 만들어가는 기적·우정·가족의 의미에 주목해야 한다는 ‘VR의 아버지’의 조언이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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