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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독감백신 품귀에…첩보작전 같은 `원정·유료 접종`

함정선 기자I 2020.10.21 14:32:03

만 12세 이하 어린이 백신 곳곳서 부족 현장 이어져
의료기관 개별 구매 후 정부가 가격 산정 방식
일부서 낮은 단가 때문에 공급 적었다는 지적 나와
개별구매로 정부 관리 벗어나 부족 현상 지속 전망

[이데일리 함정선 기자] “혹시 우리 애만 접종 못하면 유치원의 다른 부모들이 꺼릴까 싶어 좀 일찍 퇴근해서 알아봤는데 지역 내 모든 병원에 전화를 돌려도 백신이 없다는 거예요. 소아과는 물론 내과도 마찬가지고. 알고 보니 미리미리 백신 물량을 파악해서 첩보 작전처럼 움직였어야 하는 거였죠.”

최근 만 12세 이하 아이를 둔 부모들 사이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한탄이다. 소아과에서 독감 백신을 접종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 수준이고 그나마 내과 또는 피부과 어느 지역에서는 정형외과에서 접종했다는 얘기도 있다.

[이데일리 이영훈 기자] 만 70세 이상 어르신이 지정된 병원과 보건소에서 인플루엔자(독감) 백신을 무료로 접종받을 수 있는 19일 서울 강서구 한국건강관리협회 서울서부지부에서 한 시민이 줄을 서서 입장을 기다리고 있다.


“매년 하던 접종인데”…만12세 이하 어린이 백신 품귀

만 12세 이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인플루엔자(독감) 백신 품귀 현상이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다.

문제는 이같은 품귀 현상이 정부, 질병관리청의 힘으로도 해소되기 어렵다는 것이다. 만 12세 이하 어린이 백신은 정부가 구매해 제공하는 물량이 아니기 때문에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설득과 안내뿐이다. 이에 일부 지역에서는 백신을 구하지 못해 접종을 하지 못하는 일이 겨울이 끝날 때까지 이어질 수도 있다는 얘기도 나온다.

이렇다 보니 지역 맘카페에는 백신 접종이 가능한 병원을 공유해 달라는 글이 게재되고, 보건소에는 접종이 가능한 병원을 문의하는 전화가 끊이지 않는다. 결국 무료 접종을 포기하고 유료 접종을 선택한 부모도 꽤 된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만 12세 이하 어린이 중 유료 접종을 한 인원은 15만명이 넘는다.

정부는 올해 예년보다 507만 도즈, 507만명분이 증가한 2898만 도즈의 백신을 유통할 계획이다. 유통 과정에서 상온에 노출된 것으로 의심되고 백색입자가 발견된 백신 106만 도즈를 제외해도 그렇다. 질병관리청에 따르면 18일 기준 2만8476개 의료기관에 공급된 독감 백신은 2678만 도즈로 전체 유통량의 92.4%다. 대부분 백신이 공급된 상태인데, 왜 유독 만 12세 이하 어린이 백신만 품귀 현상을 보이는 것일까.

정부 낮은 단가에 코로나19 가세, 무료 백신 공급 줄여

정부의 독감 예방접종사업 중 만 12세 이하 어린이 접종은 백신을 국가가 한꺼번에 조달해 의료기관에 공급하는 방식이 아니라 일선 의료기관이 직접 제조사에서 필요한 물량만큼 백신을 구매하도록 돼 있다. 소아과나 의원이 백신을 먼저 구매하고, 나중에 보건소가 비용을 지급하는 방식이다.

만 12세 이하 어린이 접종은 오래된 사업이다 보니 각 의료기관이 대략 물량을 파악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이 때문에 품귀 현상이 나타난 초기, 질병청은 만 12세 이하 독감 백신 부족 현상이 발생하는 것은 의료기관별, 지역별 편차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고 대수롭지 않게 반응했다.

그러나 의료기관과 백신 제조사들은 정부의 낮은 단가와 코로나19 때문에 만 12세 이하 백신 품귀 현상이 발생했다고 보고 있다. 만 12세 이하 어린이 접종과 일반 성인이 3만~4만원을 내고 접종하는 유료 백신의 공급 과정은 같은데, 무료 접종은 정부가 돈을 내는 바람에 단가가 낮다 보니 백신 제조사 입장에서는 단가가 낮은 쪽 공급을 꺼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제조사들이 애초 올해 만 12세 이하 어린이 접종이 많은 소아과 쪽으로는 물량을 그리 많이 공급하지 않았다는 얘기가 나온다. 특히 올해는 코로나19와 독감의 동시 유행 때문에 유료 백신에 대한 수요가 컸기 때문에 만 12세 이하 백신 물량이 예년보다 적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다.

“단가 문제 없다”는 정부, 병원도 못 구하는 무료 백신

정부는 의료기관이 유료 접종용으로 구입한 백신을 만 12세 이하 어린이에게 접종할 경우도 무료 백신 단가만 지급하도록 제조사와 이미 협의를 마쳤기 때문에 단가 문제는 없다고 설명하고 있다. 의료기관이 접종자에게 무료 대신 유료 백신을 유도하거나 권유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일선 의료기관에서조차 백신을 구하기 어렵다는 것 문제다. 이미 발주했던 만 12세 이하용 백신에 대한 접종을 끝낸 대부분 소아과나 내과는 추가 물량을 구하지 못하고 있다.

한 백신 제조사 관계자는 “소아과에 정부 백신으로 공급하면 예를 들어 1만원 밖에 못 받고, 성인이 많이 찾는 시내 내과나 다른 병원에 유료 백신으로 공급하면 1만 6000원을 받는다면 당연히 유료로 공급하고 싶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정부 조달 물량으론 한계…의료기관 설득 외 방법 없어

질병청은 만 12세 이하 어린이 백신 부족 현상을 해결하고자 13~18세 접종을 위해 구매해 의료기관에 공급한 물량의 15%를 이용하고, 일선 의료기관에 만 12세 이하 어린이 접종을 우선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것을 대책으로 내놓았다. 또 보건소 등을 통해 만 12세 이하 어린이 백신을 보유한 의료기관을 안내할 수 있도록 하겠다고도 밝혔다.

현재 만 12세 이하 어린이의 백신 접종률은 약 67% 수준이다. 예년 접종률이 85% 수준임을 고려하면 아직 접종을 하지 못한 아이들이 많은 상황으로, 13~18세의 물량 15%마저도 의료기관에 도착하는 즉시 동나는 상황이다.

문제는 질병청으로서도 현재 이 문제를 해결할 뾰족한 대책이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서울 지역에서 만 12세 이하 어린이용 백신이 부족하다면, 정부는 의료기관에 유료 백신을 어린이들에게 먼저 접종해달라고 설득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 13~18세용 또는 어르신용 백신의 일부를 이용하는 것도 물량이 정해져 있어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부모들 사이에서 ‘백신이 부족하면 다른 지역으로 원정 접종을 가거나 유료 백신을 접종해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에 질병관리청은 “12세 이하 접종과 임신부 접종은 민간 개별 구매 방식을 유지하는 것에 대해 소아청소년과와 의료계 요청이 있었다”며 “내년에는 의료계와 협의해 전체 조달 방식으로 공급하는 방식의 필요성 등을 검토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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