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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구, 주한미군 기록서 '김두한 수감문서' 최초 발굴

김기덕 기자I 2020.11.03 13:32:24

김두한 등 16명 미군정 재판받아 미7사단구금소 수감
“평소 알려지지 않은 많은 현대사 기록 발굴 가능해져”

[이데일리 김기덕 기자] 1947년 4월 20일 남산 옛 동본원사(東本願寺)에 거처를 두고 있던 김두한 등 대한민주청년동맹(대한민청) 소속 우익테러대원들이 반대파인 정진룡 일당을 폭행·살인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는 물론 단순한 폭력 사건이 아닌 좌우익의 정치적 무력충돌이었다. 이 사건으로 김두한은 구속돼 재판을 받았다. 그리고 미군정청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고 서울 용산에 있던 미7사단 구금소를 거쳐 대전형무소로 이감된다.

서울 용산구가 ‘장군의 아들’로 잘 알려진 김두한의 미7사단 구금소 수감 사실을 확증하는 문건을 최초로 발굴했다고 3일 밝혔다.

이번 문건은 1948년 3월 15일자로 작성된 ‘미군정재판 군사위원회 명령 2번’과 같은 해 3월 26일자로 작성된 ‘명령 3번’, 5월 17일자로 작성된 ‘명령 5번’이다.

명령 2번에는 김두한 등 일당 16명이 각각 교수형(김두한), 종신형(김영태, 신영균, 홍만길, 조희창), 30년형(박기영, 양동수, 임일택, 김두윤, 이영근, 이창성, 송창환, 고경주, 김관철), 20년형(문화태, 송기현)을 언도 받았다. 해당 문건에서는 ‘전술한 형량이 모두 적절하게 집행될 것(foregoing sentences will be duly executed)’이라고 명시돼 있다.

1948년 3월 15일자로 작성된 ‘미군정재판 군사위원회 명령 2번(일부)’.(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전자사료관)
명령 3번은 김두한을 제외한 나머지 사건 관계자들이 미7사단구금소에서 각각 마포형무소, 대구형무소, 광주형무소, 부산형무소로 이감될 것임을 보여준다. 명령 5번은 “(김두한의) 형 집행은 미극동사령관 확인 전까지 보류될 것”이라고 적혀있다. 또 대전 형무소가 구금 장소로 결정돼 ‘죄수(김두한)가 즉시 이송될 것”이라고 기록돼 있다.

이후 김두한은 대전형무소로 이감됐으나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이승만 전 대통령에 의해 특별사면 됐으며, 제3대 민의원 당선(1954년 서울 종로을), 제6대 국회의원 당선(1965년 용산구 보궐), 국회 오물투척 사건(1966년) 등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1972년 55세 나이로 사망한다.

미7사단 구금소는 용산기지 내에 위치한 군사 시설이다. 전신은 일제강점기 일본군 제20사단이 만든 ‘용산위수감옥’으로 군형법을 어긴 일본군인, 군속들을 가두기 위해 지난 1909년 준공했다. 이후 111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용산 미군기지에 감옥 담장을 비롯한 일부 건물이 옛 모습 그대로 남아있다. 김천수 용산문화원 역사문화연구실장은 “신문기사를 통해서만 알려졌던 김두한 수감 관련 사실을 주한미군 기록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며 “우리가 알지 못하는 현대사의 많은 이야기들이 여기 묻혀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용산구 미7사단구금소(옛 용산위수감옥) 현재 모습.
구는 해방 후 미7사단의 용산기지 주둔, 김두한 수감 기록, 한국전쟁 시기 용산기지의 역할 등 새로운 사료가 포함된 용산기지 역사책 ‘(가칭)6.25전쟁과 용산기지’를 오는 12월에 발간한다. ‘용산의 역사를 찾아서(2014년)’, ‘용산기지 내 사라진 둔지미 옛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2017년)’에 이은 용산기지 역사 3부작 마지막 권이 될 것으로 보인다.

성장현 용산구청장은 “온전한 용산공원 조성을 위해 근현대시기 저 땅에서 과연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살피는 것도 우리의 과제”라며 “용산기지 관련 새로운 사료를 지속적으로 발굴, 시민들에게 하나하나 소개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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