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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들의 극단적 저항, `삭발투쟁`의 역사

이정훈 기자I 2019.05.03 15:06:56

유교적 전통에 역행…단발령에 목숨 던져 항거하기도
불교승려나 수감·입대에 삭발…비정상·부자연 이미지
삭발과 투쟁 한몸으로…여대생·장애아부모 저항수단
정치권도 적극 활용…탄핵·법안개정 등에 맞선 투쟁
포천시 예타면제 따낸 1등공신…한국당은 희화화 역풍도



[이데일리 이정훈 기자] 때아닌 삭발이 화제다.

유교적 전통이 강한 우리 사회는 예로부터 부모님께 물려받은 터럭 하나도 건들지 못하게 했다. 이렇다보니 1895년 고종 재위 시절 전국에 단발령이 내려지자 목숨을 던져 항거한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고 한다. 예외적으로 삭발을 했던 불교 승려는 머리카락을 다 잘라냄으로써 속세를 등지는 것은 물론이고 인간으로서의 모든 욕망을 버리고 다시 태어나겠다는 강력한 종교적 의지를 표현했다.

그러다 이 땅에서 삭발이 널리 퍼진 것은 일제 시대였다. 일제는 감옥이나 군대, 학교에서 가차없이 삭발을 명령했다. 이 세 곳은 모두 획일성을 강요함으로써 사회로부터의 격리, 공동체와의 단절을 표시하고자 했다.

어떤 이유건 간에 삭발은 사회적 구성원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비정상적이거나 자연스럽지 않은 행동이며 그런 점에서 강렬한 시각적 효과를 주고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어필할 수 있는 행동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삭발은 투쟁과 항상 붙어다니는 연관어가 됐다. 학생의 삭발은 교사에 대한 반항으로 읽히고 노동자의 삭발은 사주에 대한 항의로 받아들여진다. 그런 점에서 삭발투쟁은 기댈 곳 없는 상대적 약자나 소수자가 사용할 수 있는 극단적 저항의 형태다.

지난 2001년 10월 서울 광화문 한복판에서 덕성여대에 다니고 있던 여학생들이 단체로 삭발시위에 나섰다. 당시 재단측의 비리와 재단이사진 문제로 학내 분규로 몸살을 앓고 있던 학교의 정상화를 바라는 시위였다. 문제가 있는 이사진 퇴진과 관선이사 파견을 요구한 이들의 삭발투쟁은 이후 2005년 12월 사학법 개정의 원동력이 됐다.

또한 지난 2016년에도 `목숨 걸고 지켜줄게`라는 구호로 뭉친 서울 발달장애인 부모들은 장애를 가진 자녀들이 지역사회에서 살아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고자 삭발투쟁을 감행했다. 이후 21차례에 걸친 노숙농성까지 더해진 끝에 한 달만에 서울시와 발달장애인 정책수립 태스크포스팀(TFT) 구성에 합의했고 서울시는 이듬해 발달장애인 정책 요구안을 시 예산안에 반영하기에 이르렀다.

상대적 약자라고 부르긴 어렵지만 정치권에서도 삭발투쟁은 그리 드물지 않은 투쟁방식이다. 주로 야당 의원들이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뤄졌다.

지난 2004년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 설훈 의원은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안이 국회를 통과하자 이에 항의하며 삭발을 하고 단식투쟁까지 한 적이 있다. 지난 2007년 한나라당도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단체 삭발투쟁을 감행한 적이 있다. 당시 정부가 사학법을 개정하자 한나라당 의원들이 반발했고 3명이 사학법 재개정을 요구하며 삭발에 나섰다. 이후 50여일간 이어진 장외투쟁으로 한나라당의 뜻대로 사학법은 재개정됐다.

지난 2013년에는 지금은 사라진 통합진보당 소속 의원 5명이 황교안 당시 법무부 장관 주도로 이뤄진 정당해산 심판청구에 반발하며 집단삭발한 역사도 있다.

이처럼 역사가 삭발투쟁의 효과를 보여주고 있는 만큼 지금까지도 그 명맥은 이어지고 있다. 다만 그 의미는 다소 바뀌고 있다. 불과 넉 달 전이었던 올 1월 경기도 포천시민들은 지역 숙원사업이던 옥정~포천 지하철 7호선 연장의 예비타당성조사 면제를 얻어내기 위해 발표 직전 서울 광화문광장을 찾았다. 지역민의 거의 10%에 이르는 1만3000여명이 찾은 상경집회에서 당초 계획보다 2배나 많은 1016명이 단체삭발식을 가졌다. 포천에 밀려 예타 면제를 따내지 못한 의정부나 양주시가 결정적 패인을 이날 삭발식으로 꼽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남긴 퍼포먼스 성격이었다.

어제(2일)도 삭발투쟁은 가장 핫한 키워드로 대한민국 국민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선거제와 검경 수사권 조정,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 설치 등 개혁법안의 패스트트랙(신속처리법안) 지정에 항의하는 자유한국당의 장외투쟁에서 삭발투쟁이 또다시 등장한 것. 삭발 1호인 박대출 의원에 이어 김태흠·윤영석·이장우·성일종 의원과 이창수 충남도당 위원장 등 5명이 애국가 합창에 맞춰 단체삭발시위를 벌였다. 보수층 결집을 위한 홍보효과가 있겠지만 `나경원 대표도 삭발하라`는 청와대 청원 글이 올라올 정도로 희화화된 측면도 있다.

그리고 한국당의 퍼포먼스에 묻히긴 했지만 같은 날 가습기살균제 유족과 피해자 10여명이 피해 정도와 상관없이 사과와 배·보상을 요구하며 옥시 본사 앞에서 무기한 농성에 돌입했다. 이 자리에서 가습기살균제참사전국네트워크(가습기넷) 김기태 위원장은 “오는 7일 오전 11시 청와대 앞에서 피해자들과 사망자 유족들의 삭발식을 진행한 뒤 피해자들의 편지를 (청와대에) 전달하겠다”고 예고했다. 정부와 가해기업측이 어떤 답을 내놓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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