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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년 전 집단 성폭행’ 고백한 유서...유죄 증거될까?

홍수현 기자I 2024.05.07 13:46:19

"너무 죄송하다"며 친구 3명 공범 지목
법원 "기억 왜곡됐을 가능성"

[이데일리 홍수현 기자] 15년 전 집단 성폭행 범죄를 유서를 통해 고백했다고 하더라도 유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의 판단이 나왔다.

(사진=게티 이미지)
7일 법조계에 따르면 대법원 3부(주심 이흥구 대법관)는 지난달 12일 특수준강간 혐의로 기소된 B, C, D씨에게 유죄를 선고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B, C, D씨는 당시 중학생 2학년이었던 지난 2006년 새벽 같은 반 학생이었던 피해자를 불러내 만취할 정도로 술을 먹이고 항거불능 상태를 이용해 간음해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위반 혐의를 받고 있다.

이 사건은 피고인들과 친구 관계였던 A씨의 유서에서 수사가 시작됐다. A씨는 지난 2021년 3월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 유서를 남겨 B, C, D씨와 저지른 범죄를 고백했다.

피해자는 수사 기관에서 범행일로 추정되는 날 실제로 술에 취한 채 귀가했고 속옷에 피가 묻어있었다며 A씨의 유서 내용과 부합하는 진술을 했다.

범행 추정일 다음 날 산부인과를 방문했고 피임약을 처방받았으나 의사가 성범죄 피해와 관련한 명확한 판단을 내리지는 않았다고 한다.

B, C, D씨는 재판에서 범행이 약 15년 전 일어난 일이고 술에 취해 있어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고 주장했으나 약 9개월의 수사 끝에 2021년 12월 재판에 넘겨졌다.

법원에선 유서의 증거능력에 대한 판단에 따라 유무죄가 갈렸다. 형사소송법에 따라 사건관계인이 사망해 재판에서 직접 진술할 수 없는 경우, 그가 남긴 진술서 등 증거는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특신상태) 아래 쓰였다는 점이 증명돼야 쓸 수 있다.

1심은 유서를 증거로 쓸 수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지만, 항소심 법원은 유서의 내용을 신뢰할 수 있다고 보고 피고인 3명에게 각각 징역 2년6개월을 선고했다.

그러나 대법원은 유서를 증거로 사용할 수 없다며 원심판결을 파기했다. 대법원은 A씨가 남긴 유서의 내용을 수사 기관에서 경위를 조사하지 않아 법정에서 다루지 않아도 될 만큼 신빙성이 담보된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이 사건 유서의 내용이 법정에서의 반대신문 등을 통한 검증을 굳이 거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신빙성이 충분히 담보된다고 평가할 수는 없다”며 “A씨는 유서를 작성한 직후 극단적 선택을 했다. 수사기관에서 이 사건 유서의 작성 경위를 상세히 밝히거나 그 기재 내용의 구체적 의미를 세부적으로 진술한 바가 없다”고 설명했다.

대법원은 “이 사건 유서는 사건 발생일 즈음이 아니라 사건 발생일로부터 무려 14년 이상 경과된 이후 작성됐다”며 “A4 용지 1장 분량으로 작성한 이 사건 유서는 그 표현이나 구체성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이 사건 유서의 내용이 객관적 증거, 진술 증거로 뒷받침된다고 보기도 어렵다”고 부연했다.

대법원은 “이 사건 유서의 내용 중에는 피해자의 진술 등과 명백히 배치되는 부분도 존재한다”며 “A씨에 대한 반대신문이 가능했다면 그 과정에서 기억의 오류, 과장, 왜곡, 거짓 진술 등이 드러났을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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