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이 다시 커진 최근 사정을 반영하듯, 14일 오전 각종 기념일마다 오르는 실시간 검색어에는 ‘발렌타인’과 함께 안 의사의 이름이 나란히 보인다.
안 의사는 대한제국 말기 독립운동가로 일제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를 중국 하얼빈역에서 사살한 의거로 한국사에 자신의 이름을 영원히 남겼다.
안 의사 의거는 1909년 10월 26일 실행됐다. 하얼빈 역에서 매복 중이던 안 의사는 플랫폼에서 이토를 확인하고 벨기에 FN사에서 만든 자동권총 FN M1900 권총으로 그를 저격했다. 안 의사가 발사한 탄환 3발 모두 급소를 맞췄고 이토 히로부미는 얼마 후 사망한다.
현장에서 체포된 안 의사는 뤼순에 있는 일본 법원에 송치돼 재판을 받게 된다. 당시 이토가 거물 정치인이었고 일제에 대한 국제적 반발이 컸던 때라 안 의사를 변호하려는 이들도 많았으나, 일본 법원이 변호인 선임을 불허하면서 관선 변호사가 형식적인 변호를 맡게 된다.
그마저도 일본 정부가 법원에 “극형에 처해야 한다”는 지침을 내려 사법부 독립성조차 지켜지지 않은 날림 재판이었다.
안 의사는 결국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 3월 26일 오전 10시 교수형으로 생을 마감했다. 안 의사는 유해를 하얼빈 공원에 묻어 두었다가 해방이 되면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게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러나 일본 당국이 안 의사의 유해 인수를 거부해 오늘날까지도 그가 뤼순 인근에 묻혀있다고 추정만 할 뿐이다.
민족주의 역사학자 박은식이 저술한 한국통사는 안 의사가 나이 겨우 32세, 이립을 갓 넘긴 나이에 죽음을 앞두고 남긴 말은 다음과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는 대한 독립을 위해 죽고, 동양 평화를 위해 죽는데 어찌 죽음이 한스럽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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