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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리퍼 신고 가도 지리산을 볼 수 있다

조선일보 기자I 2009.09.04 13:45:01

지리산 언저리 마을 산청 예담촌

[조선일보 제공] 산청·함양·하동(경상남도) 구례(전라남도) 남원(전라북도) 다섯 개 군에 걸쳐 있는 이 푸근한 산을 '종주'로만 즐기기는 아까운 일이지요. 지리산의 '옆모습'을 보고 싶은 사람들을 위해 걷기 전문가 세 명이 길과 지도를 정리한 책, '지리산 둘레길&언저리길 걷기여행'(황금시간·1만7000원)이 최근 출판됐습니다. 책에 소개된 29개 코스 중 초보자도 쉽게 걸을 수 있는, 경남 함양과 산청의 지리산 언저리길 세 개를 골라 소개합니다.

▲ 경남 함양과 산청은 지리산의 북쪽을 살포시 물고 있어 이 큰 산의 좋은 기운을 넉넉히 받는다. 함양 화림계곡 부근 논 위로 바람이 스친다.

"최씨 고가 열쇠 좀 줘요. 가방 앞주머니에 있어요." "던졌어요. 찾았어요?"

열쇠 하나가 담벼락을 넘더니 흙길에 툭 떨어졌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성내리, 지리산 언저리 마을 예담촌을 안내하는 문화해설사 정구화(72)씨에겐 담 넘어 아내와 물건을 주고받는 게 일상인 모양이었다. 예담촌의 담은 집안이 들여다보이지 않을 정도로만 높아 아낙의 가는 팔로도 담 넘기기가 거뜬하다. 돌멩이와 진흙을 섞어 쌓은 소박한 담은 감시용 카메라와 창살로 무장한 서울의 높은 담과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게 억울할 듯했다.

담이 아름다운 예담촌엔 30채의 한옥이 터를 지키고 있다. 대부분 꽃 가꾸고 마루 닦으며 사람들이 생활하는, 살아있는 집이다. 정씨는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된 한옥은 이씨 고가(古家)로 지은 지 약 400년이 흘렀다"며 "담벼락 중엔 200년 넘은 것도 있다"고 했다. 돌과 흙으로 만든 담은 물이 천적이라 담 위에 기와지붕을 얹어 비를 가렸단다.

▲ 산청 예담촌의 오래된 담벼락.

"양반집 주변 집들의 담은 좀 더 높은 편입니다. 양반들이 조랑말 타고 행차를 하니, 그들에게 집 안이 보일까 걱정해서지요."

천천히 돌면 한 시간 정도 걸리는 예담촌을 즐기는 덴 규칙이 따로 없다. 천천히 담 사이를 걷는 게 방법이라면 방법이다. 담 사이를 걷는 덴 제한이 없고 대문이 열려 있는 집은 들어가서 구경해도 된다. 단 이씨 고가, 최씨 고가, 사양정사(泗陽精舍) 등 규모가 큰 한옥은 정씨에게 하루 전쯤 미리 연락(011-789-0801)해야 속속들이 둘러볼 수 있다. "골동품 장사들이 하도 뭘 가져가서" 취한 조치란다.

이씨 고가 앞에 X자 모양으로 서 있는 두 그루의 회화나무는 담과 어우러진 모양새가 기이하다. "회화나무가 뿜는 산소가 유난히 머리를 맑게 해준답니다. 그래서 선비가 많은 고장엔 회화나무가 많다지요. 이사할 때 나무를 파서 함께 옮길 정도로 귀하게 여겼지요."

▲ 함양 화림계곡 탐방로.

고목(古木) 아래서 심호흡을 하며 선비 흉내를 낸 다음엔 이 마을에서 20번 국도를 따라 3.5㎞ 정도 떨어진 '목면시배유지'(木棉始培遺址·경남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 106-1)에서 '고려 선비' 문익점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좋겠다.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1363년 붓 통 속에 몰래 넣어 가져온 목화씨를 처음 뿌려 재배했던 목화밭 주변에 1997년 전시관(입장료 1000원)이 세워졌다. 문익점의 일대기를 설명한 영상물과 목화의 재배 과정을 풀어내는 3차원 입체 영상 등 목화에 대한 상식을 배우는 재미가 쏠쏠하다. 전시관 한 바퀴 둘러보고 나면 매표소에서 파는 솜털 보송보송한 목화씨(한 봉지 1000원)를 사서 커다란 화분에 심어 보고픈 욕심이 밀려온다.

≫더 걷고 싶다면(거리·시간: 약 6.5㎞·2시간)

예담촌 뒤, 마을을 휘감아 도는 남사천 옆 붉은색 산책로까지 간다. 개천을 왼쪽에 두고 걷다가 '초포동교'를 건너 왼쪽 길을 따라 뒷산으로 들어선다. 왼쪽 길이 약간 오르막인 Y자 갈림길을 만나면 왼편으로 가고 바로 다음 갈림길에서도 왼쪽으로 간다. 다랑이 논을 내려다보며 조금 더 걸으면 운동장이 나온다. 운동장을 통과해 정면의 길로 쭉 가면 덕산골 마을이다. 콘크리트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가다 넓은 아스팔트 도로를 만나면 오른쪽으로 간다. 오르막 하나 넘어 새터마을로 들어서서 오른쪽에 '드림모텔' 보이는 사거리를 만나면 왼쪽 비닐하우스와 논 샛길로 가서 굴다리를 지난다. 배양상회 지나 오른쪽으로 꺾으면 목면시배유지다.

◆가는 길

●자가용으로: 대전-통영고속도로 단성 나들목으로 나와 우회전→중산리·시천 방면 20번 국도→남사사거리→예담촌

●대중교통으로: 산청군 신안면 '원지터미널'에서 '중산리·대원사행' 버스를 탄다. 오전 6시30분~오후 9시30분, 약 30분 간격으로 버스가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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