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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닥쳐라! 영화평론] 시대의 해방은 욕망의 광기를 낳는다

고규대 기자I 2017.07.31 13:38:07

영화 '레이디 맥베스' 리뷰

영화 ‘레이디 멕베스’
[오동진 영화평론가] 유명 원작, 특히 고전을 영화로 만든 작품은 두 가지 면으로 관찰해 들어가면 흥미가 배(倍)가 된다.

영화와 원작은 어디가 어떻게 다른가. 그리고 무엇보다 ‘왜’ 달라져 있는 가이다. 감독은 원작을 왜 바꾸고 재해석 하려고 했을까. 어떤 영화는 원작과 대동소이하다. 대부분의 평작이 그렇다. 어떤 영화는 소설과 아주 다르다. 그런데 그것 역시 예상 외로, 그리고 실망스럽게도, 범작들이 많다. 반면 아슬아슬하게 다르거나 미묘하게 차이가 나는 영화들이 있다. 대부분의 수작, 걸작들은 거기에서 나온다.

최근 작품으로는 박찬욱의 ‘아가씨’가 좋은 예이다. 국내에 수입돼 곧 개봉될 화제작 ‘레이디 맥베스’도 그렇다. 영화를 보는데 고전문학을 읽는 느낌이 드는 작품은 실로 오랜만이다.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원작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을 넘어 서서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과 D.H.로렌스의 ‘채털리 부인의 사랑’을 동시에 읽는 느낌을 준다. 요하네스 베르메르의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를 보고 있는 착시(錯視)까지 준다. 한 편의 영화로 그 모든 것을 망라하기란 도통 쉬운 일이 아니다. ‘레이디 맥베스’가 접근하고 있는 예술적 성취의 경로가 바로 그 지점에서 찾아진다.

‘레이디 맥베스’는 영국의 연극 연출가 출신 감독, 윌리엄 올드로이드의 데뷔작이다. 올드로이드 감독은 이야기의 시공간을 제정 후기로 가고 있는 짜르 체제의 러시아(원작은 1865년에 발표됐다.)에서 더 뒤의 시기, 곧 1800년대 후반의 빅토리아 시대 말기인 영국 지방의 고립된 성(城) 안으로 옮겼다. 소설 속 주인공인 카테리나 리보브나가 정략 아닌 정략결혼으로 들어가게 되는 가문은 갑자기 돈을 벌게 된 상인 부자의 집안이지만 영화 속 주인공 캐서린(플로렌스 퓨)이 가는 곳은 몰락해 가고 있는 지방의 토호 지주다. 이건 거의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약간은 다른데 그 차이가 사실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소설과 영화의 결말이 사뭇 다른 것도 여기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 차이의 간극에 영화는 이른바 여성주의(feminism)적 시선을 깊이 개입시킨다. 허구 속 인물이지만 카테리나와 캐서린의 운명은 거기서부터 확연히 갈리게 된다.(영화의 결론과 소설의 끝에서 여자들의 운명은 아주 다르다.) 두 작품은 같이 시작해서 아주 다른 곳으로 가버린다. 그렇다고 완전히 갈라 서지도 않는다. 이 기묘한 동이(同異)야 말로 올드로이드 감독이 ‘러시아의 맥베스 부인’을 ‘레이디 맥베스’로 만들며 성취해 낸 미학의 꼭짓점이다.

영화 ‘레이디 멕베스’
17살 밖에 되지 않은 캐서린은 보수적인 집안의 분위기로 숨통이 턱턱 막힌 채 살아 간다. 어린 여자에게 이건 심한 고문과 같은 일이다.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편(폴 힐튼)은 그런 아내를 수음(手淫)의 대상으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 내심 초야(初夜)를 기대했던 어린 신부는 첫날의 실망감에 이어 날이 갈수록 점점 마음 속에 불만과 증오, 반항심을 쌓아 가기 시작한다. 남편과 사이가 좋지 않은 시아버지(크리스토퍼 페어뱅크)는 그런 그녀의 ‘비뚤어진’ 욕망이 피어나고 살아날까, 감시의 눈초리를 번득이기 일쑤다. 고요하다 못해 적막한 대 저택에서 그녀는 할 일이 없어 무료하고 권태롭기 짝이 없다. 때 마침 육체적으로 탄탄해 보이는 하인 세바스찬(코스모 자비스)이 어린 여주인에게 접근한다. 둘은 곧, 불붙은 장작에 기름을 부은 듯 타오르기 시작한다. 둘이서 매일 같이 벌이는 섹스의 향연은 곧 끔찍한 참살(慘殺)의 비극, 그것도 연쇄적인 살인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이 집안의 하녀인 애나(나오미 아키)에 의해 처음부터 끝까지 목격되기에 이른다.

캐서린이 매일 아침 크리놀린(드레스를 볼록하게 만드는 틀로써 잘록한 허리를 한층 부각시키는 스커트 버팀대. 1800년대에 유행했다.)을 착용하기 전 애나가 등 뒤에서 코르셋을 조일 때야 말로 이 집안에서 캐서린이 얼마나 숨막혀 하며 살고 있는 가를 느끼게 해 준다. 캐서린이 숨을 훅 들여 마시기도 전에 애나는 끈을 팽팽하게 잡아당기는데 마치 그건 개 목줄을 당기는 느낌을 준다. 빅토리아 시대의 귀족 가문의 여자라면 혹은 그렇게 되고 싶은, 계급 상승 욕구를 지닌 신흥 부르주아 집안의 여자들은 코르셋을 더더욱 바짝 죄면서 살았던 시대다. 캐서린이 세바스찬에게 욕정을 풀게 되는 것은 미천한 남자지만 자신의 코르셋, 그 조임 쇠를 풀어 줄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여자는 섹스 때문이 아니라 해방감 때문에 남자의 몸을 탐하기 시작한 셈이다. 캐서린의 마음속에는 하인과의 관계를 통해 보란 듯이 남자 중심의 집안의 분위기를 깨뜨리고 싶은 욕구도 작동한다. 계급의 간음(姦淫)이라는 금기를 넘어서고자 했던 욕망 이야말로 그녀가 추후에 일으키게 되는 모든 비극이 절대적 씨앗이었던 셈이다. 예전 같으면 캐서린의 그 같은 일탈이 절대로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문제는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캐서린은 여자의 육감으로 그것을 알아채지만 이 집안의 남자들, 그 당시의 남자들만이 그것을 알아 차리지 못한다.

영화 ‘레이디 멕베스’
끔찍한 참상은 대체로 ‘자본=물적(物的) 토대’의 대 전환기에 벌어진다. 한때 일대를 호령하던 대 지주였을 지는 모르지만 캐서린의 집안도 이제는 ‘업종 전환’을 해야 살아 남게 돼있을 만큼 황량하고 척박한 분위기다. 그건 바로 산업혁명이 시작됐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들은 ‘다른 장사’로 돈을 벌거나 재산을 축적해야 한다. 새로운 중산층들(상인 자본가들과 광산업이나 철도 업을 하는 대형 사업가들)이 사회 권력을 차지하려고 제도 안으로 들어 오고 있는 참이다. 모든 계급이 들끓고 있던 때였다. 아래 계급이 위로 가고 위의 계급이 아래로 내려가던 때였다. 모든 계급 관계가 뒤죽박죽이 되던 시기였다. 돈이 우선시 되는 시대에는 언제나 그렇지만 정숙이니 도덕이니 하는 것은 여성들 스스로부터 내심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 시작한다. 영화에서 세바스찬이 흑인과의 혼혈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이전 시대의 고루한 모든 것이 붕괴되기 직전 임을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캐서린의 남편이 집 안을 자주, 그리고 오래 동안 비우게 되는 것, 그리고 그 빈 침대에 세바스찬이 들락날락 할 수 있었던 데는 그가 광산 일에 열중하느라 집 안을 오래 비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거기에서 육감적인 하층 계급의 여자를 만나 캐서린에게 얻지 못한 육체적 회포를 풀고 살다 아이까지 생긴다. 그런데도 그는 캐서린이 정숙치 못하다고, 이미 자신에게까지 그 소문이 들려 온다고 따지다가 결국 두 불륜 남녀에 의해 무참하게 사단이 난다.

그건 모두 이 남편 정도 되는 인물에게는 시대적 감이 없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돈 버는 양상이 달라지면 사람들의 생각이 달라진다. 곧 하부구조(노동수단과 노동의 대상, 방식 등)의 변화, 혹은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변증법적 변화는 상부구조(정치, 종교, 도덕, 규범, 결혼 윤리 등)의 변화를 가져 온다. 예전의 가치관, 그 기득권=남성 중심적 사고로 살아가려는 남편 같은 인물은 시대의 미묘한 변화를 감지할 리가 없다. 자신과 같은 남자가 여전히 세상을 지배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캐서린은 폐쇄적인 집 안의 룰로 살아 갈 생각이 추호도 없다. 여자는 남자 말이라면 무조건 따라야 한다는 생각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어차피 두 부자(父子)는 몰락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녀는 그들 없이도 자신이 알아서, 더 나아가 자신이 집안을 좌지우지하며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더 나아가 시대의 전환은 그런 자신을 용서하고 받아 들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바스찬이 여주인을 성적으로 넘보게 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예전이라면 꿈도 꾸지 못했을 일이다. 캐서린이 주도하고 세바스찬이 따라 가는 식의, 무모 하리만큼 과도했던 둘의 살인 행각과 그 원죄는 이들 자신보다 이들이 속한 사회구조에 있었다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닌 셈이 된다. 캐서린이 알고 보면 지독한 악녀이고 팜므 파탈(치명적인 여자)이지만 이상하게도 영화를 보는 내내 천연덕스럽게 사랑스럽고 그 모든 악행이 역설적으로 이해를 못할 바도 아니라는 마음이 드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시대는 변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의식, 특히 남자들의 생각이 따라 가지 못한다. 모든 개인사의 비극은 그럴 때마다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역사와 예술, 특히 문학이 그것을 증명해 왔다. ‘레이디 맥베스’가 얘기하고자 하는 것 역시 그 부분이다.

영화 ‘레이디 멕베스’
영화감독들이 100년이 훨씬 넘은 고전 문학에 탐닉하는 것에는 이유가 다 있다. 하나의 텍스트 안에 이토록 다양한 층위의 얘기가 겹쳐져 있는 작품이 이 때 거의 다 나와 있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고 있으면 올드로이드 감독이 지금의 시대 역시 100년 전 영국 시골에서처럼 급속하게 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것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고 걱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도 계급적 편견과 인종적 차별, 특히 주체적으로 살아가는 여성들에 대한 시선과 시야를 확보하지 못한, 시대착오적 인물들 때문에 지금 세상이 이 모양 이 꼴이 됐다고 그는 생각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이야말로 윌리엄 올드로이드가 니콜라이 레스코프의 원작으로 회귀한 까닭일 수 있겠다. 고전의 재해석을 통해 사람들은 종종 깨달음을 얻는다. <레이디 맥베스>가 해 낸, 비교적 위대한 업적이 아닐 수 없다.

◇[오동진의 닥쳐라! 영화평론]은 영화평론가 오동진과 함께합니다.

글을 쓴 영화평론가 오동진은 상세하다 못 해 깨알과 같은 컨텍스트(context) 비평을 꿈꿉니다. 그의 영화 얘기가 너무 자세해서 읽는 이들이 듣다 듣다 외치는 말, ‘닥쳐라! 영화평론’. 그 말은 오동진에게 오히려 칭찬의 글입니다. 윗글에 대한 의견이 있으신 분들은 ‘닥쳐라!’ 댓글을 붙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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