X

[임병식의 창과 방패]우리, 착각하지말자

e뉴스팀 기자I 2020.07.16 08:03:32
[임병식 국회입법정책연구회 상임 부회장]더불어민주당 이해찬 대표가 결국 고개 숙였다. “국민들께 송구하며 시정 공백에 책임을 통감한다.” 고소인에게도 “민주당 대표로서 통렬한 사과를 드린다. 근거 없는 비난을 멈추고 정쟁 몰이로 이어지지 않기를 바란다”고 당부했다. 늦었지만 다행이다. 고인이 된 박원순 시장은 공(功)은 공대로, 과(過)는 과대로 평가하면 된다. 그런데 비판하는 쪽에서는 허물만으로 공을 덮으려하고, 옹호하는 쪽에서는 공으로만 허물을 감싸려하고 있다.

사실 성 추문은 미래통합당 전신인 새누리당, 한국당 단골 메뉴였다. 그런데 입장이 바뀌어 불명예가 민주당으로 넘어왔으니 아이러니하다. 직장 내 성 추문은 권력과 관계가 있다. 안희정, 오거돈, 박원순이 지닌 개인적 품성을 넘어선다는 뜻이다. 무딘 성인지 감수성에서 비롯된 일들이다. 이들은 선출직이면서 집권당 소속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새누리당, 한나라당도 집권당일 때 비슷한 추문에 휩싸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보수진보 다르지 않다.

결국 여성을 권력 관계에서 바라보는 그릇된 인식이 문제다. 그 중심에는 시대 변화에 둔감한 중년 남성이 있다. 여성을 소유물로 여기고, 원시적 욕망조차 통제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우리는 동물의 왕국에 살고 있다. 딸 가진 부모, 여자라는 이유로 평생 가슴 조이며 살아야하는 사회라면 부끄럽다. “이 정도는 괜찮겠지”하는 안일한 성인지 감수성을 개선하지 않는 한 유사한 추문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시대가 변하면 시대에 맞는 성인지 감수성을 갖추는 건 당연하다. 그런데 아직도 많은 이들은 고루한 성 인식에 갇혀있다. 기껏해야 가사와 육아 부담을 깨인 남성상으로 여길 정도다. 여성과 남성은 동등한 인격체다. 현실에서는 그렇지 않다. 남성은 여성보다 우월하고, 남성 상사는 여성 직원에게 권력이다. 허약한 성인지 감수성을 점검하고, 실질적인 양성평등 실현에 진지하게 사회적 합의를 모을 때다.

북유럽 국가는 양성평등에서 앞서 있다. 2015년 세계경제포럼은 남녀평등지수를 발표했다. 아이슬란드,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가 1~5위를 차지했다. 한국은 조사 대상 153개국 가운데 117위로 취약했다. 이후로도 마찬가지다. 2019년 108위로, 4년 만에 9단계 올랐지만 여전히 후진성을 면치 못했다. 교역규모 10위, 5030클럽 7번째 가입국이 지닌 민낯이다. 덩치만 컸지 생각은 멈춘 민망한 현실이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조사한(2019년) 성불평등지수는 10위여서 의외다. 어떤 지표를 사용했는지 모르지만 공감하기 쉽지 않다. 자고나면 터지는 성 추문과 취약한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감안하면 10위는 턱없다. 북유럽에서 여성은 85%가 경제활동을 한다. 반면 한국은 50% 수준이다. 여성 임원 비율도 30%에 달한다. 한국은 2%에 불과하다. 임금 수준도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 남성을 100으로 할 때 여성은 92다. 한국은 63.4이니 갈 길은 멀다.

스칸디나비아 국가들이 달성한 양성평등은 제도적 뒷받침과 사회적 분위기 아래서 꾸준히 발전돼 왔다. 스웨덴은 육아휴직 기간만 16개월(480일)이다. 남녀가 나눠 쓸 수 있고 아빠는 최소 3개월을 의무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육아휴직 중에는 급여 80%가 지급된다. 아동 수당도 월 15만원씩 나온다. 이런 환경 속에서 여성은 당당한 주체다. 당연히 지위를 이용한 성적 괴롭힘도 찾아보기 어렵다.

<북유럽 비즈니스 산책>에는 이런 실상이 잘 소개돼 있다. 저자는 단지 제도 때문만 아니라고 한다. 특별한 대우를 거부하는 주체적 여성과, 여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바라보는 열린 남성이 함께 일궈낸 사회적 합의라고 설명하고 있다. 책은 같은 맥락에서 핀란드 최초 여성 대통령 할로넨이 남긴 말을 언급한다. “남자다운 남자 또는 여자다운 여자가 되려고 하지 말라. ‘다른 사람’이 돼라.” 주체적인 여성상을 주문한 인상적인 말이다. 살얼음판 같은 동물의 왕국에 살아가는 우리 딸과 누이들에게도 들려주고 싶다.

제도도 중요하지만 여성과 남성을 동등한 인격체로 대하는 성인지 감수성이 절실하다. 세상의 절반은 누군가의 딸이며 누군가의 누이다. 기억하자. 여성 부하 직원이 당신에게 상냥한 것은 당신이 좋아서가 아니다. 단지, 당신이 상사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착각하지 말자.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