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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무기체계 개발은 일반적으로 진화적 획득 과정을 거친다. 예를 들어 1단계에서 10단계 까지의 기술적 진화가 필요한 무기체계를 개발할 경우, 몇 단계로 구분해 세부적인 기술을 식별하고 첫 생산 시에는 소량 생산을 통해 기술적 진화와 무기체계의 안정성을 확보한다. 그 다음 2차 사업과 성능개량 등을 통해 단계적으로 기술적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진화적 획득이다. ‘배치’ 또는 ‘블록’이라고 하는 단계적 생산 과정을 거쳐 제품을 점점 완벽하게 하는 것이다. 어떤 나라 어느 회사든지 처음부터 제품을 완벽하게 만들 수 없다. 휴대폰이나 차량 등의 사례에서 보듯 심지어 잘 만들던 회사도 실수하는 경우가 있다.
◇무기체계 진화적 개발 인정 여전히 숙제
한국 방위사업의 현실은 진화적 획득과는 거리가 멀다. 정부 당국이 말로는 진화적 개발을 얘기하고 있지만,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사고라도 나면 국민 여론은 들불처럼 일어나 ‘불량무기’, ‘방산비리’라고 비난한다. 한국형기동헬기 ‘수리온’은 우리나라가 처음 만들어 본 헬기다. 조종석 앞 유리 파손이나 빗물 새는 고무 패킹 등은 단순 부품 교체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였는데도 수리온에게는 ‘결함투성이’라는 딱지가 붙었다. 특히 감사원은 수리온에 대한 감사보고서를 통해 추운 날씨에 얼음이 엔진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불량헬기’라고 낙인찍기까지 했다. 수리온은 진화적 개발을 거쳐 올해 체계결빙 테스트를 통과했다.
무기체계 개발 과정에서 실패를 용인하지 않는 것도 문제다. K-11 차기복합형 소총과 K-2 전차 파워팩 등은 시험 평가 도중 품질 불량이 드러났다. 이는 연구개발(R&D) 실패였지만 감사원이나 검찰의 잣대로 들여다보니 곧 ‘방산 비리’가 됐다. 해당 업체들은 납기지연에 따른 지체상금 부담도 떠안고 있다. 미국의 최신예 스텔스 전투기 F-35도 개발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문제가 발생했지만, 이를 처벌의 대상이나 비리로 보지 않았던 점을 감안하면 한국 방위산업의 현실은 그만큼 척박하다.
◇무기개발에도 ‘빨리빨리’
과도한 작전요구성능(ROC)도 문제다. 국내 기술역량에 대한 충분한 고려 없이 ROC만을 무리하게 반영하다 보니 무기체계 개발 과정에서 각종 결함들이 속출할 수밖에 없다. 군의 입장에선 좋은 물건을 사고 싶은게 당연하다. 그러나 기술 수준 등의 여건을 고려하지 않는 현행 ROC 제도는 개선돼야 한다는게 업계의 지적이다.
방위산업 전문가인 국회 국방위원회 소속 김종대 의원은 “업체가 주도한 공군 장거리 레이더 사업과 소부대 무전기 사업의 경우에는 시험평가 성능이 90%를 상회함에도 불구하고 군 당국의 무지로 사업이 취소됐다”면서 “해외에서 직도입된 해군의 하푼미사일의 경우 최근 실사격에서 10발 중 7발 밖에 명중하지 않았음에도 아무런 문제제기가 없었다. 이는 방위사업제도의 모순이 전형적으로 드러나는 사례”라고 지적했다.
충분치 않은 개발 기간도 현행 무기체계 개발 사업 구조의 폐단 중 하나다. 수리온 개발 과정도 그랬다. 통상 헬기 개발에는 10년 이상의 기간이 소요된다. 하지만 수리온 개발은 군의 요구에 따라 6년이라는 짧은 기간 내에 마무리 해야 했다. 사업착수 3년 2개월만인 2009년 1월 시제 1호기가 출고됐다. 추가 시험평가 단서가 붙긴 했지만, 군 당국은 시간을 아끼기 위해 개발시험 평가와 운용시험평가를 동시에 실시해 4개월만에 끝냈다. 정부가 애초에 급했다면 개발을 더 일찍했어야 하지만, 중기계획에 올려놓고 방치하다가 나중에 급해지니 빨리 만들어야 한다고 일정을 재촉한다. 업체 입장에선 부랴부랴 만들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방위산업체 관계자는 “ROC를 무리하게 반영하고 충분치 않은 개발 예산과 개발 기간으로 개발에 성공하도록 요구하는 게 현행 무기체계 획득 제도”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