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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초격차 전략 발목잡는 '삼성생명법'

최은영 기자I 2020.09.03 06:01:00

임규태 공학박사·前 조지아공대 교수

엔론은 분식회계의 대명사로 대한민국에 알려져 있다. 하지만, 엔론은 분식회계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니라 ‘공정가치’(Fair Value Convention)라는 회계 방식 때문에 망했다. 그리고 엔론을 몰락시킨 공정가치의 어두운 그림자는 여전히 한국을 뒤덮고 있다.

1985년 텍사스의 천연가스 기업으로 출범한 엔론은 1990년 하버드 MBA 출신의 야심만만한 제프 스컬링이 CEO로 취임하면서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그의 과감한 경영 전략으로 엔론은 전통적 에너지 기업에서 금융, 정보, 통신을 아우르는 미래 기업으로 탈바꿈한다.

엔론이 급성장한 배경에는 공정가치라는 혁신적인 회계 방법이 있었다. 공정가치는 기존의 ‘장부가치’ 방식과 달리 시장에서 거래되는 실제 가격으로 기업 가치를 평가하는 방식으로 ‘시장가치’(Mark-to-Market)라고도 불린다. 엔론 창업자 켄 레이는 부시 대통령 가문과의 친분을 이용해 금융기관 평가에만 제한적으로 사용하던 공정가치 방식을 일반기업에 적용하도록 규정을 바꾸었다. 엔론은 장밋빛 청사진을 터뜨리는 방식으로 주가를 띄웠고, 폭등한 주가로 기업 가치를 키워나갔다.

승승장구하던 엔론은 2000년 닷컴 버블이 붕괴하면서 위기에 직면한다. 공정가치 회계에서는 폭락하는 주가가 고스란히 손실로 기록되기 때문이다. 엔론 경영진은 회계 상 구멍을 숨기기 위해 무리수를 두었지만, 2002년 공중분해 되고 만다. 회계 부정은 몰락을 막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뿐, 닷컴 버블에 의한 공정가치 회계 방식의 리스크가 엔론을 무너뜨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정가치 평가는 명백한 합법이다. 비록 엔론은 공중분해 되었지만 이후 공정 가치는 업계 표준으로 정착되었다.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 우버, 에어비앤비, 위워크 등 파괴적 기업들이 천문학적 규모의 투자를 받을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이제는 국제 회계 표준으로 자리 잡은 공정가치 방식이 한국으로 건너와 수난을 당하고 있다. 삼성바이오로직스가 가치 평가를 장부가격에서 공정가격으로 변경한 것을 문제 삼은 것이다. 회계법은 형사법이 아닐뿐더러 공정가치는 명백한 합법이다. 기업은 회계법 테두리 안에서 자신이 유리한 쪽을 선택할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삼성은 공정가치 회계부정 혐의라는 사법 리스크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지금 대한민국에서는 더욱 황당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공정가격 회계를 이유로 삼성을 범죄자라고 몰아붙이던 이들이 삼성을 압박하기 위해 공정가치 방식을 들고 나선 것이다. 바로 개정을 앞두고 있는 ‘삼성생명법’이 그것이다. 현행 보험사의 타 회사 투자 한도는 자기자본의 60%, 총자산의 3% 이내로 제한돼 있다. 이번에 개정을 앞둔 삼성생명법은 타 회사 가치를 ‘장부가치’가 아닌 ‘공정가치’, 즉 현재 주가를 기준으로 변경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 법안이 통과되면 삼성생명과 삼성화재는 자신들이 보유한 삼성전자 주식 20조원 이상을 처분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을 매각한 돈을 고객에게 배당금으로 지급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보험업의 특수성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보험회사는 어떤 상황에서도 고객에게 보험료를 지불해야하기 때문에 안전자산에 투자해 맷집을 키워둬야 한다. 과연 대한민국에서 삼성전자를 대체할 어떤 안전투자처가 있을까.

공정가치 방식으로 급성장하던 엔론은 닷컴 버블 붕괴에 따른 주가 폭락으로 회계 장부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엔론이 몰락한 것은 회계 부정 때문이 아니라 주가에 의존하는 회계 리스크가 현실화되었기 때문이다. 주식 시장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만약 삼성생명 주가가 2배 상승하면 이미 내뱉은 20조원의 삼성전자 주식은 다시 채울 방법이 없다.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장담은 하지 않는 게 좋겠다. 3년 전 삼성생명 주가가 현재 가격인 6만5000원의 2배인 13만8000원이었으니까.

일반 기업도 아니고 리스크 관리가 본업인 보험사의 자산을 시장에서 수시로 변하는 주가로 평가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보험업계에 공정가치 회계 방식 적용을 반대하는 것이 아니다. 충분한 시간을 두고 신중을 기해서 부작용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보험사 자산을 시장 가격으로 평가해야겠다면 더 이상 삼성바이오로직스의 공정가치 회계 변경도 문제 삼지 않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지금 나라 밖 세상은 코로나 팬데믹과 미중 무역 갈등 속에 각자도생의 길을 걷고 있다. 한때 미다스의 손으로 불리던 손정의는 잇단 투자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ARM사를 매각하려 하고 있다. ARM사는 반도체를 직접 설계하거나 생산하지 않고, 핵심 코어 사용권을 반도체 설계 회사에 라이선싱 한다. ARM 라이선스가 없으면 당장 스마트폰의 핵심 프로세서를 생산할 수 없다. 미중 무역전쟁에서 미국이 ARM사를 압박해 중국 기업에 라이선스 판매를 중단한 것은 치명적이다. 미국 정부는 한발 더 나아가 이번 기회에 엔비디아, 애플 등 자국 기업이 ARM을 인수하길 바라고 있다. 하지만 중국을 비롯한 다른 국가들의 반발이 만만치 않다.

ARM 인수전을 둘러싼 복잡한 상황에서 모두가 용인할 수 있는 최적의 구매자는 미국과 중국의 중간지대에 위치한 삼성전자이다. 최근 삼성전자가 파운드리 비즈니스를 공격적으로 확대하면서 ARM의 주요 고객인 팹리스(반도체 설계·개발) 기업들의 반발이 적은 것도 유리한 점이다. 하지만 정작 당사자인 삼성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삼성생명법이 통과되는 순간 경영권 방어를 위해 20조원을 허공에 날려야 하는 상황에서 40조원짜리 ARM 인수는 부담스럽다.

삼성은 지난 2016년 9조원에 전장 기업인 하만을 인수해 시너지 효과를 거두고 있다. 하지만 지금 회계와 법률적 리스크에 빠진 삼성은 전략적으로나 비즈니스적으로 4배 가격표 이상의 가치를 지닌 ARM 인수는 엄두도 낼 수 없다. 삼성이 적기에 투자를 못하고 머뭇거리는 사이에 중국 반도체 굴기는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을 넘어서게 될 것이다.

언젠가는 코로나 팬데믹이 끝난다. 그 어두운 터널이 끝났을 때 대한민국은 무엇으로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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