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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어 살려고, 火를 풀려고 지은 亭子

조선일보 기자I 2010.06.11 11:35:00
[조선일보 제공] 전남 장흥군을 관통하는 탐진강은 영산강·섬진강과 함께 전남 3대 강으로 불리지만 사실 길지는 않다. 약 55㎞의 길이로, 영산강(115.5㎞)·섬진강(212.3㎞)에 비하면 소박한 편이다. 그러나 강의 실제 길이와 무관하게 강이 품은 인간의 역사는 길고, 넓다. 효(孝)이거나, 의로움이거나, 풍류이거나, 각기 다른 이유로 세운 정자 10곳 내외가 탐진강변을 따라 이어진다. 그 정자들은 전남 담양군에 못잖은 정자문화를 형성하고, 나아가 장흥이 내세운 '문림의향(文林義鄕)'의 토대가 된다.

사연은 서로 다르지만 장흥 정자들의 공통점이 있다. 먼저 낮다. 높은 언덕을 탐하지 않고 강과 함께 낮아진 곳을 택한다. 둘째로 나무와 강과 바위를 안마당에 품었으되, 그 품은 것들 안에 다시 자신을 안겨 품고 품음이 서로 엇물린다. 그래서 '밖'에선 보이지 않는 장흥 정자들은 가까이 다가서야만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낸다.

마지막으로, 더 이상 찾는 이가 드문 정자들엔 모두 세월의 더께가 두껍게 내려앉았다. 오래 찾지 않은 집 냄새를 배경으로, 벌과 거미줄과 질긴 잡초들이 정자의 주인이 됐다. 강변이라 세워졌으되, 정작 강을 잃은 정자도 있다. 여름, 서늘한 그늘 찾아 떠난 정자 기행은 정적 속 시간의 흐름을 거스르는 시간 여행을 겸한다.

◆풍류의 정자, 동백정(冬柏亭)

시작은 탐진강 상류에 자리 잡은 동백정(장동면 만년리 707)이다. 본래 동백이 울창해 동백정이나 지금 동백정을, 혹은 동백정이 품은 것은 늙은 소나무의 그늘이다. 그 사이사이 동백 잎이 소나무 그늘을 뚫은 햇살에 반짝인다. 제각기 가지를 뻗었으되 뻗는 모양새가 절도 있는 소나무는 관직에서 물러난 노(老) 선비를, 햇살을 반사하는 동백 잎은 선비의 형형한 눈빛을 닮았다.

그 풍경에서 짐작할 수 있듯 동백정의 첫 주인은 조선 세조 때 의정부 좌찬성을 지낸 김린이다. 관직 후 은거하며 다른 선비들과 시재를 겨루기 위해 정자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며 동백정은 청주 김씨 일가가 모이는 동정(洞亭)으로 쓰였다. 양반과 평민의 문화가 모두 스민 공간으로 진화한 셈이다.

1583년과 1895년, 1986년 세 차례 후손들이 중수하며 지금 모습에 이른 동백정의 구조는 다소 복잡하다.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방을 두 개 두었다. 또 한 편으론 정자 위에 작은 누각을 두었으니, 동백정에서 풍경은 깨진 거울처럼 조각난다. 그 풍경의 조각들 넓이 역시 가지각색이라, 조각난 풍경들은 합종연횡하며 다양한 관계를 자아낸다. 조금만 위치를 옮겨도, 조금만 시선을 틀어도, 이내 다른 세상이다.

정자의 창문과 기둥이 자아낸 공간적 틀 외에도, 최근의 동백정은 전에 없던 시간적 틀을 구비한 것처럼 보인다. 정자를 두른 소나무 너머 강에서 이뤄지는 제방 공사는 그 시끄러운 풍경으로 과거와 현재를 극명하게 대비시킨다. 공간적 틀로 구획된 조각난 풍경이 풍류라면, 시간적 틀로 대비된 풍경은 좀 애틋하다.

◆효의 정자, 용호정(龍湖亭)

정자는 대부분 풍류를 목적으로 지어진다. 조각난 풍경을 하나로 합치며 그 감흥을 즐긴다. 해서 정자에 걸리는 편액 중 절반 이상이 감흥을 표현한 시문(詩文)이다.

▲ 조선 시대 문신 김필은 여기 앉아 왕 잃은 분노를 달랬을까. 의(義)의 정자, 사인정.

그러나 용호정(부산면 용반리 530)은 다르다. 용호정은 효(孝)다. 용호정을 노래한 시가 이렇다. "한 정자를 물가 벼랑 위에 세우니/어버이 묘소에 성묘 드리고 돌아온다/…/정자 난간에 홀로 앉으니 부모 생각뿐이요/엊그제 어린 몸이 백발노인 되었네."

좀 더 정확히, 용호정의 뿌리는 2대에 걸친 효다. 1829년 정자를 지은 이는 최규문. 아버지 최영택을 기리기 위한 정자였다. 눈물 많은 효자, 최영택은 비가 올 때마다 성묘를 가지 못하고 강 너머 부친의 묘를 보며 명복을 빌었다. 아버지가 할아버지의 묘를 바라보며 명복을 빈 곳에 최규문이 정자를 세웠으니, 바로 용호정이다. 해서 사람들은 용호정을 두고 "아버지를 뵙기 위한 정자이자 위로하는 정자(望親之亭 慰親之亭)"라 부르기도 한다.

그 효를 향한 길은 깊어 서늘하고 적요하다. 길에서 멀지 않으면서도 길 위에선 보이지 않는 용호정은 짤막한 굽잇길을 지난 뒤에야 비로소 모습을 드러낸다. 효의 정자는 반듯하되 탐진강변 정자 중 가장 간소한 편에 속한다.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 방을 두고 사방에 마루를 들였다.

그 마루에 앉아 바라보는 풍경은 제멋대로 자란 신록의 나무들로 어둡고, 그 너머 탐진강은 넓어 막막하다. 어둡고 막막한 풍경은 그 자체로 아버지를 그리는 아들의 마음처럼 느껴지니, 이곳 정자는 다른 정자에선 알 수 없는 향취를 지녔다.

◆의(義)의 정자, 사인정(舍人亭)

사인정(장흥읍 송암리 산 359)은 탐진강 정자 기행의 종착지다. 여기서 탐진강은 가상의 경계를 넘어 이웃도시 강진군으로 흐른다. 경계에 서서 바라보는 탐진강은 느리게 휘며 강진으로 멀어진다. 유연한 강의 흐름이 평화로워 어떤 불화도 증발해버릴 것만 같은 곳에 사인정이 있다.

실제로 사인정은 분노를 다스리려 지어졌다. 시절이 수상했던 조선 초기, 김필(1426~1479)이 지었다. 1453년 세조가 단종을 폐위한 계유정난이 일어나자 그는 관직을 버렸다. 홍문관 우제학, 이조참판 등을 지낸 그다. 김필은 이듬해 장흥에 내려왔고, 탐진강이 땅을 적시는 언덕 위에 정자를 지었다.

아직 20대의 나이였으니 분노는 컸을 것이다. 그 분노를 탐진강의 유연한 힘을 빌려 잠재웠을 것이다. 향후 후학들을 길렀다는 기록이 전해진 것을 보면, 김필은 한때 분노에 맡겼던 제 삶을 잘 추스른 것처럼 보인다.

사인정은 장흥 정자 중 가장 도로에서 가까우나 그만큼 보존이 잘 된 곳 중 하나다. 다만 그 도로가 강과 정자 사이를 가로질러, 사인정에서 바라보는 탐진강은 멀다. 대신 거목을 휘감은 넝쿨을 비롯, 우거진 신록의 풍경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동백정과 용호정, 사인정 이외에도 장흥 정자는 많다. 장흥군 장모창 학예연구사는 부춘정(부산면 부춘리 365)과 창랑정(장흥읍 신흥리 40)을 추천했으니, 같이 찾는 것도 좋겠다. 동선은 동백정―용호정―부춘정―창랑정―사인정 순. 시간이 촉박해 한두 곳만 가봐야 한다면, 사인정과 용호정을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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