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멱칼럼]보이지 않고 말하지 못하는 사랑의 형태

최은영 기자I 2020.08.11 06:00:00

정재형 동국대 교수·영화평론가

요즘같이 세상이 너무 복잡하고 살기 힘들면 극단적으로 도피해 버리고 픈 심정이 들 수도 있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부족하고 항상 실수하는 인간은 그럴 수 있다. 그게 인간적 매력이니까. 그래서 인간은 서로 도와주고 용서하고 그래야 한다. 상처 주고 잘못하니까 격려하고 위로하고 그래야 한다. 현재 AI가 대세지만 머리가 아프다고 가출하며 방황하는 AI는 앞으로도 결코 없을 거다. 아무리 기계가 인간을 대체한다 해도 ‘인간미’를 잃으면 세상은 그 길로 종말이 아닌가. 인간이 인간다워야 하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가가 화두다. 내 답은 그것이다. 사랑밖에 없다. 인간이 가장 못 해서 서툴고 그래서 상대방을 힘들게 하는 일도 사랑이고 인간만이 가장 세련되게 잘 할 수 있는 일이어서 궁극적으로 멋있게 사랑하다 죽어버리려 마음먹는다. ‘사랑 그놈’ 말이다.

멕시코 감독 기예르모 델 토로(Guillermo del Toro)의 아카데미 최우수 작품상 수상작 ‘셰이프 오브 워터’(Shape of Water·2017)는 도피적 사랑을 찬미한다. 살면서 인간은 여러 번 그런 사랑을 꿈꾼다. 세상은 그만큼 힘들고 오직 사랑만이 자신을 구원할 것 같은 환상을 품는다. 1960년대 미국, 여주인공 엘라이자는 항공우주센터에서 청소부로 일한다. 고아로 자랐고 어려서 목소리를 잃어 말하지 못하는 그녀는 일상이 즐겁지 않다. 매일 똑같이 지나가는 하루의 시간은 변화가 없이 지루하다. 이 단순한 반복의 조건 속에서 직장 동료만이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는 유일한 낙이다.

그런 그녀에게 변화가 생긴다. 아마존강에서 잡아 온 인간 닮은 괴물을 실험실 수조에서 발견한 그녀는 매일 심문을 당하는 불쌍한 괴물을 몰래 도와주다 정이 들고 사랑에 빠진다. 당시 미국은 소련과의 우주 개발 경쟁 때문에 이 괴물체를 이용해 인간 대신 우주로 보낼 계획을 궁리 중이었다. 소련이 먼저 개를 우주선에 태워 보낸 실험을 했기 때문.

여인과 아마존 괴물과의 사랑 이면에는 이렇게 골치 아픈 당대 정치 상황이 배경으로 깔려 있다. 정치 없인 하루도 세상이 움직이지 않는다. 정치는 돈과 권력을 움직이고 배분하는 역할을 하므로 인간은 정치 기계의 커다란 톱니바퀴 안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걸 운명이라 한다. 운명은 사회에게서 온 것이고 정치가들이 만든다. 모든 사랑의 비극적 스토리는 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시작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 둘의 사랑을 가로막는 건 원수 부모들이 아니라 서민을 억압하는 현대 정치가들의 암투다.

소외된 두 남녀의 만남은 그 자체로 황홀한 화학적 결합. 하지만 정치적 장벽이 그들 자유를 억압한다. 이용 가치가 다한 괴물은 살려두지 않는다. 미국 정부는 그를 죽이려 하지만 서민이며 말 못 하는 엘라이자는 괴물을 물에 방류시켜 왔던 곳으로 되돌려 보내려는 계획을 실천한다. 그를 떠나보내려는 순간 엘라이자는 권력자의 총에 맞아 죽는다. 아마존 괴물은 죽은 엘라이자를 안고 물속 깊이 들어간다. 물속에서 엘라이자는 다시 살아나 그와 영원한 생을 살게 된다. 이 황당한 얘기는 많은 점을 시사한다. 지상의 사랑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랑은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고 감지되지 않아도 진정한 사랑은 존재한다. 오히려 영원불멸한 사랑일수록 현실에선 박해받는다.

박해받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괴물은 무얼 지칭하는 것일까. 말하지 못한다는 함은 무슨 뜻일까. 영화는 보는 것을 넘어 읽어야 한다. 제목, ‘물의 형태‘는 무슨 말인가. 물은 형태가 없는데 어떤 형태를 말하는 것일까. 이런 의문들을 풀어가다 보면 보이지 않고 말하지 못해도 시시각각 형태를 달리하는 물처럼 마음속 확신으로 각자 다른 사랑의 생각들이 떠오른다. 눈에 보이는 것만 믿어선 안 된다. 언젠가 다른 모습으로 나타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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