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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멱칼럼]욕망으로부터의 자유

권소현 기자I 2020.11.10 06:00:00

신세철 경제칼럼니스트
‘불확실성 극복을 위한 금융투자’ 저자

[신세철 경제칼럼니스트] 사람이 태어나서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동행한다는 욕망은 우리에게 ‘반짝이는 희망의 시작’이면서 ‘절망에 이르는 병’이 되기도 한다. 욕망은 양날의 칼처럼 선과 악,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의 갈림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갖가지 욕망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보면, 창조적 활동을 통해 보람찬 무엇인가 일궈내고 싶어 하는 생산적 욕망과 재물이나 사회적 지위를 더 채우려는 욕망이 있다. 모든 행동의 동기가 되는 욕망과 이상이 마주하면 빛과 소금이 되어 삶의 가치를 고양시키지만, 욕망과 불의가 어울리면 자신은 물론 주위까지 오염시키고 어지럽힌다. 욕망과 선이 결합하면 희망의 싹이 움트지만 욕망과 악이 야합하면 절망의 바이러스를 사회 곳곳에 퍼트린다.

육군 상병 시절 완전무장으로 6시간을 계속 행군하는 고된 훈련을 할 때였다. 기진맥진하여 경기도 포천군 가산면 길가에서 서서 잠깐 쉬는 동안 체면 불구하고 민가에 들어가 물 한 사발을 청했다. 또래 여성이 물 대신 귀한 식혜를 떠다 주며 ‘천상의 목소리’로 천천히 마시라고 하였다. 신 상병은 갈증을 해소하려는 욕망을, ‘베아트리체’는 식혜를 떠주면서 급하게 마시다 체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선한 욕망을 보였다.

생산적 욕망은 사회에 기여하며 자신도 혜택을 누리지만, 중도에 흐지부지하기 쉽다. 더 채우려는 욕망은 웬만해서 제어하기가 어려워 탐욕의 수렁에 빠뜨리기도 한다. 욕망이란 마음대로 조절하기가 진짜 어려운가 보다. 왜 꾸준히 추구해야 좋을 욕망은 중도에 포기하려 들고, 어느 선에서 그쳐야 할 욕망은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매달리다 불행을 자초하기도 하는 것일까.

창조적 욕망은 개인 생활을 윤택하게 하는 동시에 공동체를 발전시키는 희망의 돛대가 되기도 한다. 남다른 재능이 있더라도 미래를 향한 건강한 욕망이 있어야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여 개인과 사회의 번영에 기여할 기회를 가진다. 뛰어난 능력이 있어도 의지와 욕망이 없으면 그 재능을 살리지 못하고 하릴없이 썩게 만드는 사례는 수많이 보아왔다. 자꾸만 채우려는 욕망은 가끔가다 인간을 비인간으로 만들어 파멸로 이끄는 불행의 무거운 닻으로 변하기도 한다. 무엇이든 더욱 더 거머쥐려다 자신도 모르게 ‘욕망의 노예’로 전락하기 쉽다. 생각건대, 우리 인간은 어쩔 수 없이 무의식 상황에서 생산적 욕망과 함께 채우려는 욕망을 더불어 지니고 있다. 어쩌면 우리들 속에는 선한 열매와 함께 스스로 느끼지 못할 죄의 씨앗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일까.

과식하듯 분별없이 욕망을 쫓아가다가는 탈이 날 수밖에 없는 것이 세상 이치다. 제 욕심을 채우기 위해 급기야 남의 욕망을 억누르면서까지 욕망의 골짜기로 뛰어내리는 행동은 언젠가는 대가를 치러야하는데도 그 길을 택하다 보면 상처가 깊어지기 마련이다. 욕심이 많으면 그만큼 잃는 것도 많아지는 것이 세상 불변의 이치다. 많이 배우고 출세했다는 사람들일수록 얼굴에 먹칠을 하고 다니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까닭은 욕망에 사로 잡혀 판단력을 잃기 때문이다. 억지 논리로 자신을 치켜세우려는 저질 소피스트들이 소크라테스와 성이 같다며 철학자를 자처하며 가문을 뽐내려는 광경 또한 절제 없는 욕망이 원인이다. 과도한 욕망, 부당한 욕망이 자신을 욕망의 노예로 전락시켜 스스로 진창에 빠지는 사례라 할 수 있다. 그 수렁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헛된 욕망을 제어하려 자신을 경계하여야 한다.

사람들이 보람찬 무엇인가를 성취하려는 생산적 욕망을 달성하여 욕망의 주인이 되려 하기보다 더 채우려는 욕망의 노예가 되려는 까닭은 무엇일까. ‘자기 자신에 대한 신뢰’가 부족하니 더 거머쥐려 들기 때문이 아닐까. 욕망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며 마음의 평화를 얻을 때 참다운 소유의 기쁨도 다가온다. 쉽지 않은 일이기에 그 보람은 정말 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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