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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야 딱 질색" 업무시간 확 줄인 그들의 직장생활

조선일보 기자I 2010.02.02 08:18:42

스마트폰·넷북 등으로 2~3가지 일 동시 처리
"한가지 일에만 오래 매달리면 답답"
많은 정보 대충 훑어… 일부선 "인내력 떨어져"

[조선일보 제공]1일 오전 8시 30분 서울 중구 을지로2가 SK텔레콤 T-타워 15층 사무실에 출근한 남승현(27) 매니저 책상엔 MP3 플레이어·노트북·PMP(휴대용 멀티미디어 플레이어)·스마트폰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남씨 눈 놀림이 빨라졌다. 양손은 책상에 놓인 디지털 기기들을 수시로 만졌다 놨다 했다. 데스크톱 컴퓨터로 보고서를 쓰더니 어느새 노트북으로 PMP를 연결해 최신 영화를 내려받고 있었다. 다시 스마트폰으로 '맛집'을 찾다가 겨울 휴가지를 예약했다. 남씨 시선은 PMP에 가 있었지만 책상 옆 프린터에선 완성된 보고서가 인쇄되고 있었다.

"정신없지 않느냐고요? 이 생활 엄청 편해요. 한 가지 일에만 오래 매달리면 답답하잖아요. 디지털 기기로 5~6가지 업무나 잡무를 처리하면 퇴근을 4시간은 족히 앞당길 수 있어요. 철야는 딱 질색이거든요."

'디지털 쿼터(quarter)족'들이 늘어나고 있다. 영어로 '쿼터'는 4분의 1이다. 간편하고 빠른 디지털 기기를 쓰는 10~30대 신세대들이 40~60대 기성세대에 비해 4분의 1시간 내에 일 처리를 한다는 의미에서 디지털 쿼터족이란 신조어가 나왔다. 기성세대가 1시간에 하는 일을 15분도 안 돼 뚝딱 끝낸다. PC기능이 강화된 휴대전화인 스마트폰, 휴대용 PC인 태블릿PC, 음악은 물론 동영상을 볼 수 있는 PMP까지 이름만 들어도 머리가 어지러운 이 기기들은 '디지털 쿼터족'에겐 필수품이다.

▲ 지난달 20일 낮 12시 서울 서초구 양재역 인근 커피숍에서 한 포털사이트‘아 이폰 뽀개기’카페 회원들이 아 이 폰·넷 북·PMP·게임기같은 디지털 기기들을 보여주며 포즈를 취했다. 회원들은 이날 디지털 기기 기능과 사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서울대 심리학과 곽금주(51) 교수는 "'디지털 쿼터족'은 '멀티태스킹(동시에 여러 일을 처리하는 것)'이 가능한 20~30대가 주축'"이라며 "한 가지 일에 진득하게 집중했던 기성세대와 달리 이들은 생각은 짧은 대신 행동은 빠르다"고 했다.

디지털 쿼터족은 최소한 한번에 2~3가지 일을 재깍재깍 마쳐야 한다. 때문에 더 간편하고 기능이 다양한 디지털 기기가 새로 출시되면 기존에 쓰던 제품을 곧장 갈아치우고 기기를 '업그레이드'한다.

숙명여대 유소이(22·중어중문학과 3년)씨는 PMP·노트북 등 5가지 디지털 기기를 가방에 넣고 통학한다. 유씨는 "디지털 기기들이 드물었던 어린 시절엔 어떻게 살았나 싶다"며 "수업 시간에 모르는 부분은 직접 교수님한테 물어볼 때도 있지만 대부분 노트북과 휴대폰으로 검색해 확인한다"고 했다.

취업 준비생 중에도 디지털 쿼터족이 많다. 김주민(28)씨는 인터넷 검색과 문서작성 기능을 갖추고 무게가 1㎏ 미만인 '넷북'(netbook)을 2년 전부터 쓰고 있다. 김씨는 "취업 준비용 책에 나온 상식을 넷북에 저장해 두고 버스나 지하철에서 외우며 시간을 절약한다"고 했다.

이들은 한 가지 일에 몰두하는 생활은 속 터져서 못 참는다. 오랜 시간 토론을 싫어하고 손으로 글씨 쓰는 것조차 답답해한다. IT(기술정보) 회사에 다니는 김모(33)씨는 "10년 전만 해도 사람들과 깊게 토론하고 통화도 1시간 이상 했지만 지금은 토론은커녕 5분 이상 통화도 귀찮다"고 했다. "방구석에 쌓아둔 음악 CD와 책을 인터넷 중고장터에 팔고 있어요. 새 정보를 한번 접하고 나면 더 이상 '가치 있다'고 못 느끼거든요. 괜히 짐만 되는 것은 버려야죠."

최혁준(16·수원 효원고)군은 "스마트폰에 저장된 영어 단어장 프로그램으로 바로바로 영어단어를 찾는다"며 "20~30분 이상 책을 뒤지거나 읽으면 금방 지겨워진다"고 했다.

일부 디지털 쿼터족들은 "디지털 기기가 좋은 물건만은 아니다"고 했다. 아이폰 등 3가지 디지털 기기를 갖고 있는 김모(29)씨는 "넘치는 정보량을 실시간 접하다 보니 '내 생각'이 없어지는 것 같아 디지털 기기를 버리고 싶을 때도 있다"고 했다. 고려대 사회학과 박길성(53) 교수는 "멀티태스킹은 정보화 사회의 경쟁력이지만 많은 정보를 대충 훑고 마는 습관에 젖으면 인내력이나 주의력이 떨어질 수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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