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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로 1번지]피해자 중심주의와 선택적 침묵

김영환 기자I 2020.05.25 05:30:00
24일 서울 마포구 전쟁과여성인권박물관에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을 응원하는 메시지가 붙어있다.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는 25일 대구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의연을 둘러싼 각종 의혹들에 대한 입장을 밝힐 예정이다.(사진=뉴시스)
[이데일리 김영환 기자] 노무현 정부에서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을 지낸 이창동 감독의 영화 ‘밀양’은 피해자와 용서의 주체를 천착하는 작품이다. 이청준 작가의 ‘벌레이야기’를 원작으로 하는 이 영화는 피해자로부터 용서를 받기 전에 신으로부터 스스로 먼저 용서를 받고 자유를 얻어낸 유괴범의 뻔뻔함을 그린다.

이 영화에는 ‘송강호’라는 당대 최고의 배우가 주변인으로 등장한다. 피해자의 곁을 지키며 피해자의 자활을 돕는 역할이다. 그는 묵묵히 피해자 옆에서 피해자가 스스로 극복할 수 있도록 심정적 안온함만을 제공할 뿐이다. 송강호라는 주연급 배우의 캐스팅에서 피해자를 돕는 주변인을 조망하고자 하는 이 감독의 의지가 엿보인다.

2015년 12월 야당이었던 더불어민주당은 격앙돼 있었다. 한일 양국 정부의 12·28 위안부 합의에 대해 “이번 합의는 밀실에서 추진된 굴욕적·졸속적 협상으로 양국 권력자의 담합적 행위”라고 규정하면서 무효 선언을 촉구했다. 당시 당대표였던 문재인 대통령도 “평생을 고통 속에 사신 피해 당사자들을 빼놓고선 대통령이 아니라 그 누구라도 최종과 불가역을 말할 자격이 없다”고 했다.

결국 정권 교체 이후 ‘위안부 피해자’ 문제는 부침을 겪었다.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12월 “지난 합의가 양국 정상의 추인을 거친 정부 간의 공식적 약속이라는 부담에도 불구하고, 저는 대통령으로서 국민과 함께 이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다시금 분명히 밝힌다”며 앞선 합의를 무력화했다.

문 정부의 이 같은 결정의 배경에는 ‘피해자 중심주의’가 있었다. ‘피해자’인 위안부 할머니의 뜻을 받들겠다는 의지가 있었다. 문 대통령은 2018년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할머니들의 의견도 듣지 않고 할머니들의 뜻에 어긋나는 (한일 위안부) 합의를 한 것에 대해 죄송하고 대통령으로서 사과의 말씀을 드린다”고도 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에게 있어 외부 적의 존재를 긍정적으로 해석했다. 군주는 적이라는 행운을 통해 위대하게 만들어지고, 때로 군주는 적이라는 사다리를 타고 높이 올라간다고 했다. 그 중 현명한 군주는 일부러 적대감을 조성하기도 한다고도 봤다. 문재인 정부에게 있어 위안부 합의 문제를 재거론하는 것은 ‘일본·박근혜 정권’ 책임론을 띄우는 동시에 내부 결속을 다지는 꽃놀이패였다.

문제는 내부 결속에서 파열음이 감지됐을 경우다. 일본과의 관계 파기의 근거가 됐던 ‘피해자 중심주의’의 ‘피해자’가 시민단체들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나서면서 사안의 핵심이 이동했다. 피해자들은 대답없는 가해자인 일본보다 주변인의 월권을 문제 삼았다.

게다가 문제의 직접 대상이 된 당사자는 대한민국의 꼭 300명만 된다는 헌법 기관이 됐다. 177석 거대 여당 소속이다. 여당인 더불어민주당이 국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를 확인한 지 불과 한 달을 막 넘어섰다는 점에서 이 사안을 판단할 정치적 지형도 달라졌다.

청와대도 비슷했다. 당과의 거리두기가 최우선이었다. 윤미향 당선인과 관련된 질문에 청와대 관계자들은 답변은 “윤미향 당선인의 문제는 당의 문제”로 일관했다. ‘피해자 중심주의’를 이유로 일본과의 관계도 뒤집었는데 내부 문제가 되자 ‘피해자’가 쏙 빠져버렸다. 국제 질서마저도 흔들었던 과감함은 이번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이 문제를 윤미향과 당의 문제로 치부하는 것만으로도 ‘피해자 중심주의’를 저버리는 결정이다. 그렇게 아꼈던 ‘피해자’는 일본에 대해서만 유효하고 범민주당 당선자에는 적용되지 않는 것인가. 당은 윤 당선인의 신변과 관련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청와대에게 그 판단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정부는, 정부 나름대로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묵묵히 건네야 할 위로가 있다.

윤 당선자와 그가 몸담았던 정의기억연대에 제기되는 운영상의 잘못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고 있지만 문제의 본질은 그것이 아니다. 안성의 부동산의 가치가 논의의 쟁점이 되는 것은 법의 영역이다. 배임이나 횡령 같은 문제들은 윤 당선자의 신변과 관련된 일이다. 법의 판단이 어떻든 피해자 할머니들이 입었던 상처와는 무관하다.

부동산의 가치는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에게 있어야 한다. ‘피해자가 사용하지 않았던 피해자의 시설’, 이 이외의 논란은 사족에 불과하다. 사법 처리에서는 논쟁의 영역이 될 수 있겠지만 적어도 정치는 숫자가 아닌 사람을 말해야 한다.

영화 밀양은 피해자인 신애가 스스로 머리를 자르는 장면으로 마무리된다. 신애가 머리를 자를 수 있게 거울을 들어주는 이가 전술한 송강호 역의 종찬 분이다. 거울을 들어 피해자가 스스로에게 당당해질 수 있도록 돕는 일, 그것이 법이 아닌 정치의 역할이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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