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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태호의 그림&스토리]<3>대보름 밤 '다리' 좀 밟아줘야 하는 이유

오현주 기자I 2021.02.26 03:30:00

▲달빛 아래 다리 산책…임득명 '가교보월'
청계천 광통교 정월대보름 밤 '답교' 스케치
다리 밟으면 발병 없단 속설 배경 세시풍속
사람과 사람 간 다리놓는 일 중요성도 품어

임득명이 1786년에 그린 ‘가교보월’(街橋步月). 천수경이 지은 동명의 시를 보고 종이에 수묵으로 그렸다(24.2×18.9㎝). 조선시대 산수화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구성이 특징. 청계천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게 그린 뒤 광통교를 반듯하게 앉혔는데, 당대 유행한 서양화법에서 따온 듯하다. 같은 해 제작한 ‘옥계십이승첩’에 실렸다. 삼성출판박물관 소장.


혹독한 세상살이에 그림이 무슨 대수냐고 했습니다. 쫓기는 일상에 미술이 무슨 소용이냐고 했습니다. 옛 그림이고 한국미술이라면 더했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는 일을 돌아보면 말입니다. 치열하지 않은 순간이 어디 있었고, 위태롭지 않은 시대가 어디 있었습니까. 한국미술은 그 척박한 세월을 함께 견뎌온 지혜였고 부단히 곧추세운 용기였습니다. 옛 그림으로 세태를 읽고 나를 세우는 법을 일러주는 손태호 미술평론가가 이데일리와 함께 그 장면, 장면을 들여다봅니다. 조선부터 근현대까지 시공을 넘나들며, 시대와 호흡한 삶, 역사와 소통한 현장에서 풀어낼 ‘한국미술로 엿보는 세상이야기’ ‘한국미술로 비추는 사람이야기’입니다. 때론 따뜻한 위로로 때론 따가운 죽비로 매주 금요일 독자 여러분을 아트인문학의 세계로 안내합니다. <편집자주>

[손태호 미술평론가] “대보름은 아름다운 명절이라 술에 취하여 서로들 부르네/ 달빛이 대낮처럼 밝으니 봄놀이가 오늘부터 시작되네/ 노니는 발끝이 큰길을 맑게 하고 무리의 악기 소리가 광통교에 들끓는데/ 통금도 없는 밤에 맘껏 이야기하니 기쁜 마음이 갑절이나 더해라”(천수경의 시 ‘가교보월’).

정월대보름입니다. 아마 사람들이 일 년 중 가장 달을 많이 올려다보는 날일 것입니다. 다행히 날씨가 좋아 휘영청 밝은 달이 떠오르면 그 보름달을 향해 작은 소망들을 띄워 보내겠지요. 달을 향해 기도하는 것이 익숙지 않은 요즘입니다. 하지만 불과 한 세대 전만 해도 달빛 아래 장독대에 정화수 한 그릇 떠 놓고 두 손 모아 기도하거나, 시골 논에 나가 볏짚단에 불을 붙이고 기도하는 모습은 흔한 광경이었습니다. 평소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걱정·근심을 보름달에게 다 털어놓으면 달은 그 이야기를 말없이 들어줬습니다. 이렇듯 일상에서 늘 마주하는 자연에 소원을 빌고 속마음을 고백하는 것은 우리의 오랜 문화였으며, 이는 자연에 대한 경외심과 겸손함을 갖고 있기에 가능했습니다.

조선시대 정월대보름 밤에는 ‘다리밟기’란 색다른 풍속이 유행했습니다. ‘다리밟기’는 정월대보름날 밤에 다리[橋]를 밟는 풍습으로 이날 밤에 다리를 밟으면 다리병[脚病]을 앓지 않는다고 알려진 세시풍속입니다. 일명 ‘답교’(踏橋) 또는 ‘답교놀이’라고 불렀는데 조선시대 한양뿐 아니라 전국에서 성행했습니다. 많은 사람이 즐겼기에 이 광경을 옮긴 그림이 여러 점 있을 것 같지만 사실 남아있는 작품은 거의 없습니다. 오로지 송월헌 임득명(1767∼1822)이 그린 ‘가교보월’(街橋步月·1786)만이 감상화로 현전할 뿐입니다. 그래서 미술사뿐 아니라 민속학에서도 매우 중요한 작품으로 꼽히며, 회화적으로도 뛰어난 그림이라 평가합니다.

오른쪽 위에 검고 푸른 하늘에 둥실 보름달이 떠올랐습니다. 달은 직접 그리지 않고 그 주변을 칠해 중심을 부각하는 것이 전통적인 표현법입니다. 이런 기법은 흰 부분을 남겨 놓았다는 뜻에서 유백법(留白法)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이 그림도 유백법을 사용했고 그래서 달 주변은 다른 곳보다 조금 더 어둡게 칠했습니다. 처음 달로 향했던 시선은 좌측 아래를 향해 사선으로 내려와 왼쪽 건물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시선을 유도하기 위한 장치는 색입니다. 달과 가까운 건물 쪽에 그은 필선을 진하게 올렸고 건물 지붕도 하늘빛을 색으로 썼습니다. 당연히 반대편 오른쪽 건물도 같은 방향으로 그렸는데 그 사이 놓인 다리 아래로 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달빛과 건물, 물은 같은 방향의 사선인데 다리는 수평이어서 확연히 배경과 구분됩니다. 다리 위에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서 있습니다. 혼자 온 이, 벗과 함께 온 이, 무리지은 가족도 보입니다. 어느 해 정월대보름 밤, 조용히 물 흐르는 다리 위에 낮은 목소리의 웅성거림이 들리고, 겨울 찬 기운 속에도 따뜻한 인간다움이 느껴지는, 참신한 구도의 멋진 작품입니다.

임득명이 1786년에 그린 ‘가교보월’(街橋步月) 중 광통교에 오른 사람들을 클로즈업한 디테일. 당시의 다리 난간과 바닥 구조를 가늠할 수 있다.


△고려부터 성행한 답교놀이

다리밟기는 많은 문헌에서 쉽게 찾을 수 있을 만큼 성행했습니다. 중국 당나라에서 유래했다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유행했습니다. 중국에서는 단순한 액막이놀이였는데, 사람의 다리[脚]와 물 위의 다리[橋]가 같은 음으로 읽혔던 덕에 우리나라에서 더욱 즐겼던 것 같습니다.

“정월 보름에 달이 뜨면 그해에 풍년이 들 것인가를 점치며 다리밟기 놀이를 하는데, 이는 고려부터 내려오는 것으로서 대단히 성행했다. 남녀가 모여 다리 위에 들어차서 밤새도록 그치지 않으므로 법관이 심지어는 그것을 금지하고 체포하기까지 했다”(이수광 ‘지봉유설 芝峰類說’). “정월 보름날 밤이면 우리나라 남녀들이 성안 큰 다리에 모여서 노는데 그것을 일러 ‘답교’라 하며, 답교놀이를 하지 않으면 반드시 다리병을 앓는다고 한다”(이덕무 ‘청장관전서 靑莊館全書’ 중 ‘주교 走橋’).

그림 ‘가교보월’ 속 다리는 청계천 위에 걸려 있던 조선시대의 광통교(廣通橋)입니다. 광통방에 위치한 큰 다리란 뜻으로 ‘대광통교’로, 또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북광통교’로 기록하고 있지만 보통 광교라 불렀습니다. 답교놀이의 핫플레이스가 바로 광교였던 것입니다. 다른 기록은 이렇게도 전합니다. “한양 사람들은 모두 다리밟기를 하면서 밤이 새도록 놀고 즐기는데, 광통교가 가장 붐빈다”(권용정 ‘한양세시기 漢陽歲時記’).

중인화가 임득명은 정조 때 규장각서리를 지낸 인물입니다. 중인들의 시 모임인 ‘옥계시사’(玉溪詩社)에서 활동했는데 글씨·문장·그림이 모두 훌륭해 ‘삼절’로 불렸습니다. 옥계시사는 중인들이 한 달에 한번 모여 술을 마시며 시를 짓고 그림을 감상하던 모임입니다. ‘가교보월’도 그들의 시화첩인 ‘옥계십이승첩’(玉溪社十二勝帖)에 수록된 작품입니다. 비록 중인들의 모임이지만 학예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했던 모양입니다. 옥계시사 결성 당시 머리말에 “장기와 바둑 모임은 하루, 술과 여색 모임은 한 달, 잇속을 따지는 모임은 한 해를 가기 어려우나 문장을 남기는 모임은 평생 갈 수 있다”라고 썼을 정도입니다. 그래서인지 1786년 결성한 모임은 1818년까지 지속했고 단원 김홍도도 참여해 ‘송석원시사야연도’(松石園詩社夜宴圖)란 멋진 작품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광해원 개설한 앨런이 쓴 ‘조선견문록’에도 담겨

다리밟기는 외국인의 눈에도 신기하게 보였던 모양입니다. 우리나라 최초 서양식 병원 광혜원을 개설한 H N 앨런은 자신의 책 ‘조선견문록’에 “첫 보름이 떠오르는 정월대보름날 밤에 달빛 아래로 나와 그해에 다리와 발에 병이 나는 것을 막기 위해 다리를 건너가는 놀이를 한다”고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바로 앨런 같은 외국인을 대상으로 다리밟기를 알린 그림이 있습니다. 한말 풍속화가 기산 김준근(출생·사망연도 미상)이 그린 ‘정월망일에 답교하는 모양’(1880년대)입니다. 어떤 장면인지를 상단에 풀어서 적어놓은 것으로 보아 김준근의 대부분 작품처럼 외국인에게 보이기 위한 그림이 분명합니다.

19세기 말에 활발히 활동한 김준근이 그린 ‘정월망일에 답교하는 모양’(1880년대·종이에 채색·16.9×13㎝). 이마가 넓고 긴 얼굴, 뛰어난 색감 등 특유의 표현이 살아 있는 완성도가 높은 작품이다. 부산·원산 등 개항장에서 풍속화를 그려 서양인에게 판매했다는 김준근의 작품은 당시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의 각종 여행기에 삽화로 쓰였다. 프랑스 파리 기메박물관 소장.


작품에서 달은 보이지 않고 다리와 그 위를 걷는 인물만 압축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긴 담뱃대를 물고 앞선 남자 뒤로 엷은 보라색 두루마기를 입은 남자가 아이의 손을 잡고 다리를 건너고 있습니다. 아이의 붉은 두루마기를 비롯해 모두가 한껏 잘 차려입은 모습입니다. 다리는 돌다리로 ‘홍예’가 특징입니다. 조선시대에 홍예다리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는데, 만약 이곳이 한양이라면 인왕산 근처 금청교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하지만 부산에서 활발히 활동한 김준근의 이력을 볼 때 부산 수영구의 이섭교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지금은 금청교·이섭교 모두 사라져 볼 수 없는 다리기에 그림은 더욱 소중하고 애틋합니다. 또한 특유의 이마가 넓고 긴 얼굴, 뛰어난 색감 등이 살아있는, 김준근의 풍속화 중에서도 완성도가 높은 작품입니다.

△법정스님, 보름달 보며 “모두 행복하길” 기도

‘무소유’를 쓰고 실천한 법정스님은 보름달이 뜰 때마다 “살아 있는 것은 모두 행복하기”를 기도했다고 합니다. 이 글귀는 원래 ‘숫타니파타’란 불경의 문장입니다. 그리고 이 글귀 뒤에는 이런 글이 이어집니다. “어머니가 하나뿐인 아들을 목숨 걸고 지키듯이 모든 살아 있는 것들에 대해 한량없는 자비심을 발하라.” 결국 법정스님이 보름달을 바라보며 빈 소원은 자비였습니다. 아프고 괴로운 세상에 대한 간절하면서도 조건 없는 사랑을 고백했던 것입니다. 정월대보름 밤, 여러분은 누구에게 간절하면서도 조건 없는 사랑고백을 하시겠습니까.

※ 임득명과 김준근

‘다리밟기’ 풍속을 그림으로 남겼다는 것뿐 임득명과 김준근의 공통점은 거의 없다. 다른 시대에 다른 신분으로 태어나 다른 화풍을 내보였다.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초반에 활약한 임득명(1767∼1822)은 시·서·화에 모두 능한 삼절로, 글씨는 전서, 그림은 정선의 진경산수화법에 능했다고 전한다. 여러 대에 걸쳐 여항문인을 배출한 집안에서 태어났는데, 나중에 여항문인들의 시 모임인 옥계시사의 일원이 된 건 이와 무관치 않다. 1786년 옥계시사 결성 때부터 동참해 ‘옥계십이승첩’(1786), ‘옥계십경첩’(1791) 등, 시회를 주제로 한 그림을 다수 그려 시화첩을 제작했다. 대표작은 ‘서행일천리도’(1813). 관서지방을 여행하며 풍물을 읊은 시와 실경을 그린 7폭 산수화다.

풍속화가 김준근(출생·사망연도 미상)의 생애에 대해선 알려진 게 없다. 19세기 말 부산·원산 등 개항장에서 풍속화를 그려 서양인에게 판매했다는 사실만 전한다. 행적은 국내보단 되레 외국에서 찾아지는데, 해외로 ‘뻗어나간’ 그의 작품 덕이다. 당시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의 각종 여행기에 삽화로 쓰이며, 조선의 풍속을 세계에 널리 알린 화가가 됐다. 독일·프랑스·영국·러시아·미국·일본 등 세계 20여곳 박물관에 1500여점이 남아 있다. 한국 최초의 서양문학 번역본인 ‘텬로력뎡’(天路歷程·1895)의 삽화가로도 활약했다. 농사·혼례·선비와 기생 등 18세기 전통 풍속화의 주제부터 물건 제작·판매, 형벌·제례·장례 등 19세기 말 시대상을 반영한 주제까지 다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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