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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염 뚫고 모인 7만 시위대…불신이 키운 광장의 목소리

김범준 기자I 2018.08.07 06:30:00

최악 폭염속 7월중 전국서 집회·시위 6147건 열려
"정부 못믿어" 작년 7월 3676건 대비 67.2% 급증
난민·성평등·동성애 등 집회·시위 아젠다 넓어져
"현 정부가 갈등해소와 신뢰 확보에 실패한 결과"

지난 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청와대사랑채 앞 도로에서 동성애·동성혼과 난민 수용 등을 반대하는 단체들이 이러한 내용을 골자로 하는 정부의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 실행을 반대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사진=김범준 기자)
[이데일리 김범준 신중섭 황현규 기자] 지난 2일 오후 2시 서울 종로구 청와대 인근 온도계는 39도를 가리켰다. 체감 온도는 무려 41도에 습도가 40%까지 올라 대형 사우나를 방불케 했다. 3분도 채 되지 않아 숨이 턱턱 막히고 땀은 비 오듯 쏟아졌지만 이곳은 수백 명의 인파로 북적였다.

동성애·동성혼개헌반대국민연합(동반연)은 이날 오후 1~3시까지 청와대 100m 인근 청와대 사랑채 앞 도로에서 국가인권정책기본계획(NAP)을 반대하는 집회를 열었다. 이곳에 나온 약 400명(주최 측 추산 누적 1000명)의 참가자들은 “동성애·동성혼 반대, 난민보다 국민 먼저”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날 집회를 주최한 한효관 건강한사회를위한국민연대 대표는 “7일 국무회의에서 성평등·난민 등 독소 조항이 담긴 NAP가 상정된다고 해 (이를) 막기 위해 나왔다”며 “참가자 모두가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꺼이 무더위를 감수하고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최저임금, 성평등, 난민에 불법촬영까지. 역대 최악 폭염에도 거리에서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시민들은 오히려 더 늘었다. 지난달 전국에서 열린 집회는 6147건에 달한다. 전년도(3676건)에 비해 67.2%(2471건)나 증가했다, 6월 역시 마찬가지다. 작년 4311건에서 5760건으로 33.6%(1449건)나 늘었다.

광장의 촛불로 일군 문재인 정부가 과거 정부에서 풀지 못한 숙원과 갈등을 해소해 줄 것으로 기대했던 시민들은 현 정부가 1년이 지나도록 제대로 된 해답을 내놓지 못하자 거리에서 자기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아울러 현 정부 들어 집회와 시위에 관대해진 법원과 경찰 등 정부의 입장 변화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 “정부 못 믿겠다” 불신이 키운 광장의 목소리

지난 4일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 4차 집회에는 주최 측 추산 7만명(경찰 추산 1만5000명)의 대규모 인원이 참석했다. 앞서 5월19일·6월9일·7월7일 3차례 열린 일명 ‘혜화역 시위’가 광화문광장으로 진출한 첫날이자 역대 집회 중 최대 인원이다.

그늘 하나 없는 광장에 모은 여성들은 붉은색 옷으로 드레스코드를 통일한 채 “불법촬영 기소유예 웬 말이냐”, “웹하드와 사법부도 공범이다” 등의 구호를 외쳤다. 이날 서울의 낮 기온은 최고 37도까지 올랐다.

이들은 문재인 정부가 불법촬영 문제에 대해 미온적으로 대처하고 있다며 집회와 시위를 두 달 넘게 이어가고 있다. 특히 경찰청장에 이어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나서 해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남성 가해자에 대한 관대한 처벌이 몰카범을 양산하고 있다는 비난을 멈추지 않고 있다. 현 정부가 갈등해소와 신뢰 확보에 실패한 결과라는 분석이다.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소속 권영국 변호사는 “문재인 정부 출범 당시 90%에 육박했던 지지율이 최근 6·13 지방선거 이후 60% 초반대까지 하락했다”며 “적폐청산과 사회갈등 해결을 위한 정부의 노력이 별다른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자 이번 정부에 대한 기대와 지지가 빠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권 변호사는 이어 “집회와 시위가 늘어나는 것은 그만큼 법이나 제도적 해결장치가 여전히 미흡하다는 것을 보여준다”며 “실망한 시민들이 문제해결 촉구하는 직접행동에 나서고 있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최창렬 용인대 교양학부(정치학) 교수는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 1년이 지났지만 기존 사회적 갈등이 여전히 진전 없이 노출돼 있다”며 “정권교체 관계없이 시민들이 계속 거리로 나서서 분출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픽= 이동훈 기자)
◇난민·성평등·동성애 등 집회·시위 대상 넓어져

올해 들어 불거진 주요 사회 이슈로는 최저임금·갑질 등 노동계 문제, 동성애·난민·여성 등 사회적 소수자 문제들이 대표적이다. 재계와 노동계, 보수와 진보, 주류와 비주류, 남성과 여성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사안들이다. 광장에서는 성소수자 인권보호를 요구하는 집회와 동성애 근절을 주장하는 반대 집회가 동시에 열린다. 최저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집회와 인상반대 집회가 동시다발적으로 열리기도 한다. 집회와 시위가 늘어난 데는 시민들의 분출하는 목소리가 다양해진 것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다.

박영석 정치평론가는 “최저임금 논란, 취업률 정체, 난민 등 우리 사회를 억누르는 어젠다들이 많다”며 “시민들이 눈앞에 마주한 현실적인 문제들에 직접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집회가 늘어나는 게 당연한 상황”이라고 말했다.

신율 명지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집회와 시위가 늘어난 것은 현 정부가 야기한 사회 불만이 늘었다는 방증이자 정부가 모든 걸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한 대가”라고 지적했다. 신 교수는 지금이라도 정부가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해결사가 아니라는 것을 국민들이 인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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