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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썸씽로튼', 패러디와 기호 번역 해법 제시하다[홍정민의 뮤지컬 톺아보기]

장병호 기자I 2023.11.04 09:00:00

뮤지컬, 언어·비언어 상호작용 종합예술
'썸씽로튼', 번역으로 패러디 의미 살려
'맘마미아!' '사운드 오브 뮤직' 등 차용
한국 관객 친숙한 패러디 추가 흥미 유발

한국 뮤지컬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한 데에는 라이선스 작품(해외 원작을 현지화한 작품)의 역할이 컸다. 하지만 해외에서 유명한 작품이라고 해서 한국에서도 무조건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한국 관객의 기대와 수요에 맞게 적절히 현지화해야 좋은 반응을 얻을 수 있다. 뮤지컬 번역 전문가인 홍정민 동국대 영어영문학부 교수가 국내에서 크게 흥행한 해외 라이선스 작품의 사례를 살펴보면서 이들 작품이 어떻게 현지화에 성공할 수 있었는지를 다양한 각도에서 소개한다. ‘편집자 주’

[홍정민 동국대 영어영문학부 교수] 비 오는 거리, 중절모를 쓴 신사가 접은 우산을 어깨에 메고 노래를 부르며 걷다가 옆에 있는 가로등을 한 팔로 붙잡고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얼굴을 반만 가리는 가면을 쓴 남성이 검은 망토를 두르고 ‘크리스틴’을 부르며 울부짖는다. 뮤지컬 팬이 아니더라도 이런 장면을 본다면 어떤 작품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좀 더 관심이 있다면 함께 나오는 멜로디까지 흥얼거릴 수 있다.

이처럼 유명한 작품들은 모두 대표적인 이미지가 있다. 그리고 그 이미지는 대사나 가사, 동작, 소품, 조명, 멜로디 등 다양한 기호가 개별적이라기보다 한꺼번에 통합적으로 대중에게 각인된다. 주지하듯 뮤지컬은 종합예술로 언어와 비언어 기호가 상호작용을 하면서 메시지, 정서 등 총체적인 의미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작품의 인지도가 높을수록 이러한 총체적 의미가 전달되는 속도와 정도도 빠르고 클 것이다. 공연예술이 영상처럼 고정되거나 반복 재생할 수 없는 ‘찰나의 미학’임을 감안할 때 그러한 의미가 신속하고 온전하게 전달된다면 관객들의 이해나 감동도 커질 것이다.

쉽지 않은 다층적 패러디 번역, 성공적으로 풀어낸 ‘썸씽로튼’

뮤지컬 ‘썸씽로튼’ 2020년 공연의 한 장면(사진=엠씨어터).
하지만 어떤 작품이 한국에서 공연된 적 없거나 공연되었더라도 대중적으로 잘 알려지지 않았을 경우, 대사나 가사를 한국어로 그대로 옮기고 동작, 소품, 조명을 똑같이 재현하더라도 총체적 이미지가 온전히 전달되기는 힘들 것이다. 원작 문화권이나 국가에서만 익숙한 대상을 어떻게 자연스럽게 전달할 것인가의 문제는 어떠한 장르의 번역에서든 발생하지만, 언어뿐 아니라 그 밖의 기호까지 함께 고려해야 하는 공연예술에서는 훨씬 더 복잡하고 다차원적이다.

지난해 초 라이선스 재연을 성공적으로 마친 ‘썸씽로튼’은 이러한 복잡하고 다차원적인 문제의 ‘끝판 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작품이 코미디로서는 드물게 흥행에 성공한데다 번역에서 특히 큰 호평을 받았다는 점은 번역가(스타 번역가 황석희 번역가가 맡았다)를 비롯한 제작진이 이 어려운 문제를 잘 풀어냈음을 보여준다.

뮤지컬 ‘썸씽로튼’은 16세기 극작가이자 극단 운영자인 닉과 나이젤 바텀 형제가 당대 최고의 스타 작가 셰익스피어에 맞설 역작 집필에 고심하던 중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듣고 인류 최초의 뮤지컬을 제작하는 과정을 그린 코미디다. 작품의 관전 포인트는 셰익스피어의 명작에 등장하는 캐릭터, 대사, 에피소드의 다채로운 변주와 수많은 유명 뮤지컬과 문학 작품의 패러디로, 관객들은 익숙한 대상의 색다른 모습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

특히 노스트라다무스가 닉에게 뮤지컬이라는 장르를 소개하면서 부르는 대표 넘버 ‘어 뮤지컬’(A Musical)은 그 정수라고 할 수 있다. ‘레미제라블’,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 ‘렌트’, ‘캣츠’ 등 총 27개에 달하는 유명 뮤지컬 작품의 제목과 넘버가 대사, 가사, 소품, 동작, 음악 등 다양한 기호를 통해 패러디 된다. 문제는 이 가운데 국내에 내한 또는 라이선스로 소개된 작품이 12개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따라서 빠르게 지나가는 각 패러디의 총체적 의미를 한국 관객들도 신속하고 온전하게 이해하고 즐기도록 하기 위해서는 번역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그 간극을 메울 필요가 있다.

지극히 미국적인 요소, 한국인이 친숙한 언어·비언어 기호로 대체

뮤지컬 ‘썸씽로튼’ 2020년 공연의 한 장면(사진=엠씨어터).
이 넘버는 뮤지컬의 특징을 음악과 노래, 춤과 동작, 배우, 내용과 분위기, 관객 반응 등의 순서로 정교하게 설명한다. 춤과 동작에 대한 설명이 나오는 부분에 “Feel that fascinating rhythm moving to your feet”(환상적인 리듬과 발의 조화로운 움직임을 느껴봐)라는 가사가 나온다.

여기서 ‘fascinating rhythm’은 뮤지컬, 클래식, 재즈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활동한 미국의 대표 작곡가 조지 거쉰이 작곡한 노래의 제목이다. 브로드웨이 관객에게는 친숙하다. 하지만 국내 관객들에게는 생소한 만큼 한국 공연에서는 서두에 언급한 ‘싱잉 인 더 레인’의 음악, 동작, 소품 등이 사용된다. 즉, 해당 장면의 멜로디가 흘러나오는 동안 노스트라다무스는 “경쾌한 리듬에 아임 싱잉 인 더 레인”이라는 가사를 부르면서 노란 우산을 들고 경쾌하게 걷는 동작을 취한다. 미국 관객에게 익숙한 노래의 제목이라는 언어 기호가 한국인에게 좀 더 친숙한 뮤지컬 작품의 언어 및 비언어 기호로 대체된 것이다.

또, 뒤에 나오는 “It’s a musical! A Seussical? No, a musical with girls on stage”(뮤지컬이야. 수지컬이라고? 아니, 무대에 여자들이 나오는 뮤지컬)라는 가사에는 국내에 소개된 적 없는 ‘수지컬’이라는 뮤지컬의 제목이 언급된다. 한국 공연에서는 이를 국내 대표 라이선스 흥행작 ‘맘마미아!’의 ‘댄싱 퀸’(Dancing Queen), 그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멜로디와 “뮤지컬에선 여자도 주인공 될 수 있어”라는 가사로 대체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수많은 인기 라이선스 작품 가운데 ‘맘마미아!’가 선택된 이유다. 원곡자나 작품의 인지도뿐 아니라 의미적 연결성 측면도 영향을 주었을 수 있다. 즉, 아바의 인기나 뮤지컬의 흥행 성적뿐 아니라 원작 가사에 여성이 언급된다는 점까지 감안하여 여성이 극을 주도적으로 이끌어 나가는 작품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다. 특히 한국 공연 가사는 원작보다 여성의 존재를 좀 더 부각시킨다. 이는 작품의 주요 여성 인물인 ‘비아’와 ‘포샤’의 적극적이고 진취적인 캐릭터와도 의미적으로 일관성 있게 연결된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원작에는 뒤이어 브로드웨이에서는 잘 알려진 ‘사우스 퍼시픽’ 속 장면, 즉 해군 모자를 쓰고 굽힌 양팔을 좌우로 흔드는 안무가 나온다. 한국 공연은 이러한 소품과 동작을 앞서 바꾼 가사의 의미에 맞춰 굽힌 양팔을 하나씩 위로 들어 올리는 동작으로 대체하고 “And the women are risque”(여자들은 도발적이야)라는 가사를 “위풍당당 여자들”로 바꾼다. 여성의 주체성이 한 번 더 강화되는 대목이다.

‘서편제’ ‘라이온 킹’ 패러디 추가로 대중적 공감대 형성

뮤지컬 ‘썸씽로튼’ 2020년 공연의 한 장면(사진=엠씨어터).
브로드웨이 거장 스티븐 손드하임의 작품으로 미국 관객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선데이 인 더 파크 위드 조지’의 음악과 동작 역시 해당 작품이 국내에 소개된 적 없다는 점을 감안하여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나아가 전 연령층에 친숙한 ‘사운드 오브 뮤직’ 속 가장 유명한 넘버 ‘도레미 송’의 음악, 동작으로 대체된다. 여기서도 해당 작품이 선택된 이유를 인지도뿐 아니라 의미적 연결성 측면에서 유추해볼 수 있다. 원작과 한국 공연 모두 바로 다음에 ‘애니’의 음악, 동작, 소품이 나온다. 한국 공연의 경우 가능한 여러 대안 가운데 ‘애니’와 가족 뮤지컬이라는 장르적 특성을 공유하는 ‘사운드 오브 뮤직’을 선택함으로써 또 다른 측면의 의미적 연결성을 높이고자 했을 수 있다.

또 다른 부분에는 “a true, blue, new musical”(제대로 된, 관능적이며 새로운 뮤지컬)이라는 가사와 함께 ‘시카고’의 음악과 동작이 등장한다. 하지만 한국 공연에서는 ‘오페라의 유령’의 “크리스틴”이라는 가사와 함께 ‘팬텀 오브 오페라’(The Phantom of the Opera)의 멜로디와 한 손을 얼굴을 가리는 동작이 등장하고 바로 이어 ‘노트르담 드 파리’의 ‘대성당들의 시대‘(Le Temps Des Cathedrales) 멜로디를 배경으로 가사가 “뮤지컬의 시대가 다가와”로 패러디된다. 즉, 음악과 동작이 음악, 동작, 가사 등 좀 더 다양한 언어와 비언어 기호로 바뀐 것이다. ‘시카고’도 국내 관객들에게 잘 알려진 작품이지만, 이들 두 작품의 총체적 이미지가 한국 관객들에게 좀 더 즉각적인 효과를 낼 것이라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원작에 없던 마디를 덧붙여 한국 관객들에게 특히 친숙한 패러디를 추가함으로써 이해나 흥미의 효과를 배가시킨 경우도 있다. 우선, 해외 유명 작품뿐 아니라 한국 창작 작품인 ‘서편제’의 대표 넘버 ‘살다보면’의 가사와 음악을 첨가해 국내 관객들 사이에 ‘내적 친밀감’을 강하게 불러일으키고자 했다. 해당 넘버가 뮤지컬뿐 아니라 드라마, 서바이벌 음악 프로그램, 유튜브 등에서 수없이 불리며 일반 대중들에게도 상당 부분 알려져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그러한 효과는 한층 더 클 수 있다. 또, 이 넘버의 가장 마지막에는 ‘라이온 킹’의 ‘서클 오브 라이프’(The Circle of Life)에 나오는 “마즈밴야~”라는 가사와 음악에 텀블링 동작까지 추가된다. 해당 가사가 국내에서 유머 효과를 위해 자주 패러디된다는 점을 감안할 때 웃음을 한 번 더 강화하려는 시도일 수 있다.

뮤지컬 번역, 언어와 비언어 기호의 관계 총체적으로 검토해야

뮤지컬 ‘썸씽로튼’ 2020년 공연의 한 장면(사진=엠씨어터).
서두에 강조한 바와 같이 뮤지컬에서는 언어와 비언어 기호가 복잡하게 얽히면서 하나의 의미를 형성하며, 이러한 다층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특정 작품의 이미지가 대중에게 각인된다. 따라서 이를 번역할 때도 원작의 언어는 물론, 언어와 비언어 기호 간 영향 관계를 총체적으로 검토하는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를 토대로 기호들을 정교하게 선택하고 이어 붙이는 작업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진다면 관객들도 작품을 관통하는 메시지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원작의 감동’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뮤지컬에 대한 패러디로 가득한 ‘썸씽로튼’이 뮤지컬 마니아뿐 아니라 일반 관객에게도 큰 호응을 얻었다는 사실은 그러한 작업이 불가능한 일은 아님을 보여준다.

* 본 칼럼은 2022년 출판된 ‘뮤지컬 번역에서 상호텍스트성에 대한 멀티모달적 고찰: ‘썸씽로튼’을 중심으로’ 제하의 논문 일부를 발췌 및 수정한 것입니다. 원작은 브로드웨이 오리지널 프로덕션의 공식 계정에 2017년 2월24일 업로드된 유튜브 영상을, 한국 공연은 2022년 1월5일 업로드된 한국 재연 공식 프레스콜 유튜브 영상을 참고한 것입니다.

△필자 소개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현재 동국대 영어영문학부 영어통번역학과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 분야는 뮤지컬 번역으로, ‘Taboos, Translation, and Intersemiotic Interaction in South Korea‘s Successful Musical Theaters’, ‘국내외 뮤지컬 번역 연구 현황 및 향후 연구 방향’, ‘패밀리 뮤지컬 번역과 아동 관객: ‘마틸다’를 중심으로’, ‘뮤지컬 번역에서 상호텍스트성에 대한 멀티모달적 고찰: ‘썸씽로튼’을 중심으로’ 등 라이선스 뮤지컬 번역 현상을 다각도로 분석한 논문을 A&HCI급 국제 학술지, KCI 등재지 등 국내외 저명 학술지에 활발하게 출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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