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병식의 창과 방패]정세균의 '선공후사' 외교

이성재 기자I 2021.04.16 07:12:05
[임병식 서울시립대 초빙교수] 정치부 기자 시절, 정세균 의원을 더러 만났다. 그는 고향에 내려 올 때마다 바쁜 일정을 쪼개 언론인들과 자리했다. 국회의장에 취임한 직후로 기억된다. “이제는 목소리도 내고, 언론플레이도 하시라”고 조언했다. 그는 “내 목소리는 중요치 않다. 국민을 위한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며 담박하게 응수했다. 당시는 정치적 수사로만 여겼다. 하지만 오랜 세월 변함없는 행보에서 진정성을 확인한다는 이들이 많다.

정세균 국무총리가 오늘 퇴임한다. 2020년 1월 취임 이후 1년 3개월만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경제와 국민통합에 적임자라고 했다. 정 총리는 실물경제를 경험했고 정책능력이 뛰어나다. 또 여야를 떠나 너른 품과 통합능력을 인정받는 몇 안 되는 정치인이다. 그러나 코로나19 복병을 만나 재임 기간 내내 노란색 민방위복을 벗을 틈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정치철학인 ‘선공후사’를 말없이 실행에 옮겼다.

마지막 공식 일정인 이란 방문도 연장선상에 있다. 이란 방문은 억류된 선장과 선박을 돌려받기 위해서였다. 한국과 이란 정부는 어렵게 합의했다. 정 총리 방문 일정은 11~13일. 출발 이틀 전, 9일 이란 정부가 선장과 선박 억류를 해제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총리실 입장에서는 허탈했다. 어렵게 일군 성과를 홍보할 좋은 기회였는데 무위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이란 정부 또한 정 총리 도착에 맞춰 석방할 계획이었다.

한데 이란 정부가 서둘러 석방한 이면에는 정 총리 의지가 작용했다. 정 총리는 “더 기다릴 이유가 없다”며 즉시 조치하라고 지시했다. 이틀 동안 어떤 변수가 있을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였다. 미국과 이란 관계가 살얼음판인 상황에서 하루가 시급했다. 결국 이란 정부는 이틀 앞서 석방했다. 정 총리가 귀국한 13일, 이란 정부는 우라늄 농축액을 60%까지 올려 생산하겠다고 발표했다.

하루만 늦었더라면 수포로 돌아갈 수도 있었다. 정 총리로서는 퇴임을 앞두고 좋은 기회를 발로 찬 셈이다. 하지만 국익 앞에서 개인은 뒤였다. 이유를 묻자 “개인적인 치적보다 미래 국익을 위해 당연한 결정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미국과 이란 관계 정상화를 위해 우리 정부가 측면 지원에 나서고, 동결된 70억 달러 지급에 필요한 점검협의체를 만들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란 정부는 한국 정부에 서운할 수밖에 없다. 원유를 팔고도 돈은 받지 못하니 감정이 곱지 않다. 그렇다고 우리 정부 홀로 국제 제재 기조를 거스를 수도 없다. 한국 선박을 억류한 이유도 이 때문이다. 자칫 장기화될 수 있는 상황에서 이란 정부를 설득했으니 내세울 만한 외교 성과임은 분명하다. ‘선공후사’가 아니었다면 아찔했다. 퇴임 후 다시 민주당원으로 돌아가는 정 총리는 이제 ‘선당후사’를 앞세운다.

정 총리는 속된 말로 튀는 정치인이 아니다. 조용하고 담백하다. 오랫동안 정치를 해왔지만 큰 소리치고 상대를 공박하는 일은 여전히 낯설고 어색하다고 한다. 국회의장 재직 당시는 이런 일이 있었다. 당시 여론은 최순실 특검법 연장 요구로 뜨거웠다. 국회의장 직권상정 여부가 이슈였다. 정치권도 참모들도 직권상정을 강하게 건의했다. 그러나 정 총리는 요건에 부합하지 않는다며 거부했다. 다툴 여지가 있는 데 자의적으로 해석할 경우 분열을 초래하고 잘못된 선례를 남길 수 있다는 이유였다.

이렇게 정 총리는 개인적인 이익보다 공적 가치를 우선했다. 정 총리라고 정치적 유?불리를 모를 리 없다. 그러나 의회주의자 정 총리에겐 개인적 이해보다 공(公)이 우선이었다. 그는 <정치에너지 2.0>에서 “정치란 우리가 공동체를 이루어 합의에 도달하고 그것에 따르도록 만드는 기술이자 예술이다”며 우리 정치가 지향해야할 방향을 제시했다. 19대 총선을 앞두고도 ‘선당후사’를 실행에 옮겼다. 4선 안방을 뒤로한 채 황무지나 다름없는 종로로 옮겼다.

정 총리는 당이 어려울 때마다 구원투수 역할을 했다. 당의장과 대표 때마다 상황은 좋지 않았다. 마지막 열린우리당 의장을 맡아서는 민주당과 통합 전당대회를 성사시켰다. 그때 신분은 평당원이었다. 정 총리는 퇴임과 함께 다시 민주당원으로 돌아간다. 두 차례 백의종군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은 “신은 이미 준비를 마치었나이다.”고 했다. ‘선당후사’를 앞세우며 다시 민주당으로 돌아가는 담박한 정치인, 정세균. 그 또한 모든 준비를 마쳤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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