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규태의 테코노미]잡스의 미소, 무어의 눈물

안승찬 기자I 2021.01.14 02:00:00
[임규태 공학박사·전 조지아공대 교수] 지금부터 10여 전의 일이다. 졸업을 앞둔 박사과정이 찾아와 애플이 반도체 설계 전공자를 뽑는다고 말했다. 애플이 자신들의 제품에 사용되는 반도체를 직접 설계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내 첫 번째 반응은 이랬다. “잡스가 미쳤군”.

당시 반도체 산업은 마이크로소프트와 인텔(윈텔) 연합이 지배하고 있었다. 반(反)윈텔의 선봉인 애플조차 PC라인에 인텔의 프로세스를 채택하고 있었고, 아이폰용 프로세서는 삼성으로부터 공급받고 있었다. 프로세서를 개발하고 생산하는데 필요한 인력과 비용을 감안하면 세트업체가 자기 제품에 쓰일 전용 반도체를 개발하는 것은 규모의 경제에 맞지 않았다.

내가 틀렸고 잡스가 옳았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2010년 가을 발표한 아이폰4부터 모바일 프로세서 A시리즈가 탑재되기 시작했다. 애플이 빠르게 반도체 설계 시장에 진입할 수 있었던 이유는 ARM 아키텍쳐의 유연성 덕분이다. ARM코어를 중심으로 필요한 기능을 퍼즐처럼 붙이면 자신들이 원하는 기능의 반도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물론 삼성과 공동 설계 경험도 한몫했다.

그 사이 세상은 PC에서 모바일 시대로 전환되었다. 전력소모가 중요한 모바일에서는 ARM 프로세서가 대세가 되었다. 하지만 전력 소모보다 성능이 중요한 PC와 빅데이터와 인공지능 시대에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는 서버 시장에서는 여전히 인텔 계열의 프로세서가 난공불락의 아성을 구축하고 있었다. 몇몇 스타트업이 서버용 ARM프로세서에 도전했지만 성공은 요원한 듯 보였다.

2020년 가을 애플이 다시 한번 반도체 시장에 돌을 던졌다. 애플이 자사 노트북에 사용하던 인텔 프로세서를 대신 자신들이 설계한 ARM기반 프로세서로 사용하겠다고 폭탄선언을 한 것이다. 작년 말 자체 프로세서인 M1을 탑재한 노트북은 출시되었고, 성능에 대한 평가는 긍정적이다. 애플은 ARM계열 프로세서가 전력소모뿐 아니라 성능면에서도 인텔을 넘어설 수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애플의 발표는 반도체 산업의 지각변동을 의미한다. 인텔은 2020년 10월 플레시 메모리 부분을 SK하이닉스에 매각했을 뿐 아니라 외부 파운드리를 적극 활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인텔은 반도체 산업의 역사 그 자체이다. 1969년 인텔이 최초의 범용 메모리 반도체 제품을 내놓은 이후 한번도 반도체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인텔의 창업자인 고든 무어가 제안한 무어의 법칙은 여전히 반도체 산업의 항해도 역할을 하고 있다. 하지만 화무십일홍일 뿐.

스마트폰의 등장으로 세상이 PC에서 모바일로 급속히 전환되면서 30년을 버텨온 윈텔 연합이 무너졌다. 윈텔 연합의 한 축인 마이크로소프트는 2014년 임명된 CEO 사타이 나델라의 활약으로 클라우드와 엔터프라이즈를 강화하면서 체질 개선에 성공했다. 하지만 반도체의 종가인 인텔은 변화의 물결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인텔의 문제는 현재의 인텔을 있게 한 아키텍쳐에 기인한다.

인텔이 채택한 CISC아키텍쳐(Complex Instruction Set Computer)는 이후 등장한 RISC아키텍처(Reduced Instruction Set Compute)에 비해 비효율적이지만 구조가 단순하다는 장점이 있다. 인텔 프로세서를 탑재한 컴퓨터의 성능은 반도체공정, 메모리용량, 클락스피드와 같은 하드웨어 개선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다. 24개월마다 반도체 성능이 2배로 증가한다는 무어의 법칙은 단순한 예측이 아닌 로드맵이다. 무어는 자신의 이름을 딴 무어의 법칙을 휘두르며 반도체 공정을 끊임없이 개선함으로써 윈텔 연합의 지배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바일 시대에 전력소모가 중요해지자 그동안 밀려났던 RISC계열 프로세서가 부활했다. 스마트폰에 AP로 사용되는 ARM 프로세서가 바로 RISC의 후손이다. 인텔은 ARM에 대항하기 위해 아톰이라는 저전력 모바일 플랫폼을 내놓았지만 애초부터 RISC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인텔의 또하나의 문제는 자체 생산이라는 순혈주의에 대한 집착이다. 무어의 법칙을 이끌어 온 인텔은 자신들의 반도체 공정과 기술을 업계 최고로 유지하는데 모든 역량을 집중해왔다. 다른 반도체 기업들이 연합하여 신공정을 개발할 때에도 인텔은 독자적인 공정 개발을 고집했다. 문제는 반도체 미세공정은 세대를 지날수록 개발과 양산에 점점 더 많은 비용과 시간이 소요된다는 사실이다. 2020년 기준으로 TSMC와 삼성은 7nm공정을 적용한 제품을 생산하지만 인텔은 10nm 제품 생산에 머무르고 있다. 한때 유사품 취급을 받던 AMD가 인텔을 뛰어넘는 제품을 내놓는 이유는 인텔보다 앞선 TSMC의 파운드리를 이용하기 때문이다.

외부 파운드리를 이용하겠다는 인텔의 발표는 공정 개발을 포기한다는 항복선언이다. 인텔의 경쟁 포기로 반도체 설계와 파운드리 분야는 빠른 속도로 재편될 것이다. 새로운 반도체 시대에 가장 흥미로운 위치를 차지하는 기업이 삼성이다. 삼성은 메모리, 비메모리, 파운드리 사업을 모두 갖춘 유일한 반도체 회사이다. 따라서 삼성의 전략적 선택은 향후 반도체 지형에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최근 10년간 삼성이 파운드리 사업에서 눈부신 성장을 거듭해 1위인 TSMC에 이은 2위 자리를 굳혔다. 하지만 갈 길이 멀다. 1위 TSMC와는 단시일에 넘기 힘든 기술적 격차뿐 아니라, 비메모리 사업과 상충되는 약점을 안고 있기도 하다.

중미 무역전쟁 여파로 그동안 공격적인 투자로 한국을 위협하던 중국 반도체 산업이 주춤하고 있다. 대한민국 반도체 기업들이 약진할 수 있는 기회다. 하지만 국내 리스크에 발목 잡힌 삼성은 작년 소프트뱅크가 매각하는 ARM사가 엔비디아에 넘어가는 것을 구경만 해야 했다. 연초부터 공정 개발을 포기한 인텔이 외부 파운드리 선정을 앞두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당연히 TSMC가 유력하지만, 삼성도 후보로 언급되고 있다. 삼성이 인텔의 물량을 확보한다면 단순히 파운드리 사업의 확대를 넘어 반도체 지각 변동에 중요한 변수로 작용할 것이다. 올해는 대한민국 반도체가 약진하는 한해가 되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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