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에는 다들 꺼내놓는 ‘포장된 추억’이려니 했다. 세월이 흐르면 사랑과 미움은 뒤섞인다고들 하니. 그런데 얘기가 흐를수록 ‘아차’ 싶었다.
마치 신앙처럼 예술을 했다는 화가는 “그림 외에는 아무데도 관심이 없었”단다. 수입의 70%로 물감을 사고, 대한민국 최고의 화구로 작업하면서도, 오로지 캔버스의 크기가 문제였다는 사람. 100호(162×130㎝)는 소품이었다고 했다. 끊임없이 확장해야 하는데 번번이 작은 캔버스가 발목을 잡았다는 거다. 아내는 결단을 했다. 화실을 마련해주자. “좋지도 않은 집이었지만 그걸 팔고 가장 싼 땅을 보러 다녔다. 경기 안성에 그때 돈으로 쌀 한 말 값이던, 한 평에 6000원짜리 땅을 찾아냈고 2000만원을 들여 장만했다.” 길이 3∼4m는 우스운(마지막 작품은 1000호[840×350㎝]였단다) 빛나는 대작을 쏟아낸 안성 스튜디오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1983년 일이다. 결국 화가는 소원을 이뤘다. 하지만 그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7년 뒤 그만 세상을 떠나버린 거다. 마흔아홉이었다. 아내는 많이 울었다고 했다.
한국의 기하추상을 만들고 이끌었다고 평가받는 이승조(1941∼1990) 화백의 아내 고정자(72) 여사가 털어놓은 얘기다. 이 화백은 누구도 시도하지 못한 추상세계를 연 인물이다. ‘파이프’처럼 생긴 원통모양 단위를 소재 삼아 스스로 ‘핵’(核)이라 칭한 기계미학적 회화를 빼냈다. 세상이 산업화하는 속도에 맞춘 시대적 풍경을 지독하게 엄격한 작업방식으로 대단히 고집스럽게 담아냈다.
하지만 그의 아내에게는 미칠 바가 못 됐다. 자신의 엄청난 작품들을 아내는 최고의 컬렉션으로 지켜내고 있으니. 죽을힘을 다했을 30년을 말이다. 게다가 자신의 ‘30주기 회고전’에서 아내가 “아름다운 죽음이었다”고 회상하게 되리란 건 더더욱 상상도 못했을 테고. 전업주부였던 아내는 그새 가장 확실한 ‘이승조 전문가’가 됐다. 예컨대 이 화백의 작품 중 금속성 광택이 나는 그림이 몇 점 있는데. 그 안에 심은 은색이 “중국집 철가방에서 딴 것”이란 귀띔을 누가 해주겠는가.
그 ‘30년’이 묘하게 오버랩 되는 또 다른 화가의 아내가 있다. 수화 김환기(1913∼1974)의 아내 김향안(1916∼2004) 여사다. 수화가 떠나고 그이는 꼬박 30년간 남편의 작품을 지켰다. 환기미술관을 세우고 철두철미하게 작품을 관리하며 거장의 예술혼을 빛내는 일에만 고군분투했더랬다. 그럼에도 ‘수화 20주기 전’이자 ‘금혼기념전’을 앞두고 쓴 1994년 일기에서 그이는 “50년은 참으로 긴 시간이다. 혼자 살아남아서 이 지루한 시간을 맞는다”라고 썼다.
두 아내의 공통점이라면 ‘남편의 천재성’에 굴복해 머뭇거리지 않았다는 거다. 거리낌 없이 “사람은 가고 여기 그의 예술은 남았다”(김향안)고 했고, “작품은 아직도 진행 중”(고정자)이라고 했다. 두 아내 덕에 김환기의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는 환기미술관에 걸려 있고(‘수화시학’ 전), 이승조의 ‘핵’은 안성 스튜디오에서 외출해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 걸려 있다(‘30주기 회고전: 도열하는 기둥’). 걸작을 화가가 만들었다? 천만에. 그들의 아내가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