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이리 주가 싼지 설명좀" 칼 빼든 日거래소 [김보겸의 일본in]

김보겸 기자I 2023.04.03 07:30:52

도쿄증권거래소, PBR 1배 미만 기업 박멸 계획
기업들에 1배 밑도는 원인 분석·대응책 발표 요구
토픽스500 종목 중 43%가 PBR 1배 미만
"거래소가 왜 시장가격에 개입" 불만도

[이데일리 김보겸 기자] 기어이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다. 저평가된 상장 기업들에 왜 이리 주가가 싼지,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계획을 공개하라고 요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도쿄증권거래소 얘기다.

일본증시는 재미없기로 유명하다. 최근 50년 중에 일본주식이 제일 싼 시기는 바로 지금이라는 평가마저 나온다. 코로나19로 유동성이 풀려 전 세계 증시가 자고 일어나면 치솟을 때에도 일본 대표지수인 닛케이225 지수는 1989년 12월 기록(3만8915.87)에 아직도 못 미치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지난해 30일 도쿄증권거래소 폐장을 알리는 종을 치고 있다.(사진=AFP)


칼 빼든 도쿄증권거래소

2일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도쿄증권거래소는 우량상장사가 모인 프라임마켓과 스탠다드 시장에 상장한 3300개사에 주가 수준을 분석하고 개선책을 발표하라고 요청했다.

주요 타깃은 일본 상장사 중 주가순자산배율(PBR)이 1배가 안 되는 기업들이다. 이들은 왜 PBR이 1배에 못 미치는지 원인을 분석하고 이를 개선하기 위한 대응책을 발표해야 한다. 도쿄증권거래소는 구체적 방안이나 형식은 기업 판단에 맡길 계획이다. 단 계획을 발표하지 않아도 페널티는 없다.

PBR은 투자자가 주식시장에서 상장된 주식을 사고팔 때 지금 주가가 싼지 비싼지 판단하는 대표적 지수다. PBR이 1배가 안 된다는 건 이론상으로 회사를 접고 순자산을 주주들한테 나눠주는 것이 더 낫다고 시장이 평가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상장할 자격이 없는 회사라는 의미이다.

페널티가 없어 다소 무딘 칼날처럼 보이지만 나름 작년부터 갈고닦은 방침이다. 지난해 12월28일 도쿄증권거래소는 시장재편 회의를 열고 침체하는 상장기업의 자기자본이익률(ROE)과 PBR을 어떻게 개선을 촉구할 것인지 논의했다. 이 같은 움직임이 알려지면서 기업들 사이에서는 ‘PBR을 개선하지 않는 기업은 상장 시장에서 강등되거나 토픽스에서 제외될 수도 있다’는 우려마저 나왔다.

PBR이 1배가 안 되는 기업들 중에는 대장주들도 포함돼 있다. 도요타자동차와 미쓰비시UFJ파이낸셜그룹, 미쓰비시상사 등 업계 대표선수들도 PBR 1배를 밑도는 게 일본 증시의 현주소다.

일본 거래소가 판도라의 상자를 건드린 이유도 여기 있다. 차라리 문을 닫는 게 나을 정도의 기업이 일본 증시에 너무 많다는 판단이다. 일본증시 상장사 가운데 PBR이 1배를 밑도는 기업은 절반에 달한다. 주요 기업들을 모아놓고 봐도 그렇다. 2022년 7월 기준 토픽스500를 구성하는 기업 중 PBR이 1배가 안 되는 종목은 43%에 달했다. 미국 S&P500 5%, 유로스톡600 24%보다 훨씬 높다.

도쿄증권거래소 전광판 앞에 한 시민이 서 있다.(사진=AFP)


왜 거래소가 시장가격에 개입하나

세계 증권거래소에서도 전례를 찾을 수 없는 일이다. 누군가는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겠다. “주가는 시장이 결정하는 건데, 거래소가 뭔데 이래라 저래라 하느냐”라고 말이다. 하지만 일각에선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에 가격기능을 맡기기에는 기업들이 너무 안 움직인다는 볼멘소리도 나온다.

이상적인 시나리오는 물론 있어 왔다. 기관투자자와 기업이 대화를 하고, 기업들이 자발적으로 자본효율을 개선시키면 ROE와 PBR이 올라간다.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주주총회만 가 봐도 자본배치를 효율화하라는 기관투자자 요구와 “경영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며 방어하는 사측이 팽팽하게 맞선다. 닛케이는 “이런 현실 속에선 도쿄증권거래소 강제력이 중요해진다”고 짚었다.

낮은 PBR을 방치하는 건 결국 투자자 외면으로 이어진다는 위기의식이 거래소로 하여금 총대를 메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회사들이 기업가치와 주가를 끌어올리려는 의지가 없다고 판단한 투자자들은 결국 일본 증시에서 영영 떠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쿄증권거래소가 시장 원리를 무시한다는 비난을 감수하고서라도 액션을 취한 건 이 때문이다. 거래소는 해외로부터 투자자금 유치해 기업 성장을 촉진시켜야 할 의무가 있어서다.

변화 조짐도 보이고 있다. 소극적이고 경직적인 조직 운영을 일삼는 ‘일본전통회사(Japanese Traditional Company)’의 조롱적 표현인 ‘JTC’의 큰형님 격인 다이닛폰인쇄(DNP)가 스타트를 끊었다. 지난 2월 ROE를 10%로 높여 PBR 1배 이상을 목표로 하겠다고 발표하면서다. 10년간 PBR 1배를 넘긴 적 없던 큰형님의 포부에 시장도 화답했다. 작년 연말 0.6배였던 PBR은 이 같은 발표에 0.9배까지 올랐다. 지지리도 안 올랐던 일본 증시, 욕 먹을 감수 하고 PBR 개선 계획 제출을 요구한 도쿄증권거래소의 노력은 어떤 결과로 이어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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