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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 저항'만 따지는 재판부… 조카·처제 성폭행에 잇따라 무죄

장영락 기자I 2019.02.16 06:00:00
대구·경북지역 6개 시민단체가 13일 오전 대구지방법원 서부지원 앞에서 결혼이주여성 처제 성폭력 가해자의 엄중 처벌을 촉구하고 있다
[이데일리 장영락 기자] 대구지방법원이 조카, 처제 등을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사건에서 잇따라 무죄 판결을 내려 논란이다.

대구지방법원 서부지원 제1형사부(부장판사 이봉수)는 지난달 17일 캄보디아 출신 아내의 동생을 1년 동안 상습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남성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여성이 범행 당시 소리를 치거나 저항하지 않아 성폭행으로 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피해 여성은 가해자가 언니를 폭행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자신도 협박을 당하는 등 심리적으로 공포감을 가진 상태에서 성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해 재판부 판결을 두고 논란이 벌어졌다. 재판부가 단순히 범행 당시의 물리적 저항 여부만으로 판결을 내렸다는 지적이 나온 것이다.

판결 후 여성단체 등은 “피해 여성은 성폭행 당시 잠이 든 조카들이 깨어나 충격을 받을까 봐 소리치지 못했다”며 재판부가 범죄 내용을 상세히 고려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 재판부가 물리적 저항이 없었다는 이유로 성폭행 사건에 무죄 판결을 내린 것은 처음이 아니다. 해당 재판부는 지난해 7월에도 10대 조카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30대 남성에게 무죄 판결을 내렸다.

당시에도 재판부는 “조카의 진술을 믿기 어렵다”, “삼촌이 조카를 때리나 위협한 사실이 없고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않았다”는 등의 이유로 무죄 판결을 내렸다. “사랑하는 사이였다”는 삼촌의 진술은 신뢰할 수 있지만, 성폭행 피해를 주장한 조카 진술은 믿기 어렵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30대 성인 삼촌과 10대 조카 사이에 형성되는 위계 관계는 고려도 하지 않았다.

사실 한국 형사 재판에서 적극적인 저항을 성폭행 구성 요소로 보는 관행은 오랫동안 문제로 지적돼 왔다. 해외 주요 국가에서는 상대의 동의 없이 이뤄지는 성행위는 모두 성폭행으로 간주하는 법률이 정착됐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우 70년대 이후 대다수 주에서 피해자의 적극적 저항을 성폭행 구성 요소로 보지 않는 판례를 따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여전히 ‘구체적인 저항 행동이 없었다’는 이유로 권위적 관계를 악용한 성폭행 사건에 무죄 판결을 내리는 경우가 적지 않다.

2017년에는 제주에서도 외국인 처제를 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된 남성이 “폭행 또는 협박으로 피해자의 항거를 억압할 정도의 정황이 없다”는 이유로 무죄 판결을 받아 파문이 일기도 했다. 이 남성은 결국 지난해 있었던 항소심에서 징역 7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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