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장마차서 혼술하는 김 부장, 그 뒷모습에 얹은 연민

오현주 기자I 2020.06.29 03:30:00

선화랑서 '삶의 순간, 순간들' 전 연 작가 오상열
골목길·포장마차·동네가게 등서 마주친
회색도시, 고단한 서민들 '뒷모습' 좇아
잿빛배경에 포인트컬러 하나로만 강조
애정어린 붓질로 위로얹은 회화 30여점

작가 오상열이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선화랑서 연 개인전 ‘삶의 순간, 순간들’에 건 자신의 작품 ‘어디로 가지…’(2016) 앞에 섰다. 120호(130.3×193.9㎝)를 가득 채운 움직이는 사람들 틈에 파란우산을 쓴 남자, 딱 한 사람만 멈춰 세운 작품은 광장에 점점이 흩어진 그들에 차마 섞일 수 없는 우리의 고립감을 그려냈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한 번쯤은 해봤을 거다. 어둑한 골목길을 검정비닐봉지 하나 들고 터덜터덜 걸어가는 일, 아파트 복도를 지나며 저녁 반찬을 걱정하는 일, 회사 옥상에 서서 이 일을 계속할 건가 말 건가로 고민하는 일, 식당에서 그릇이 얼굴에 닿을 만큼 머리를 박고 혼자 밥을 먹는 일.

굳이 내가 아니어도 가족 혹은 이웃이 겪은 일도 있다. 손님이 뚝 끊어진 가게 문을 닫아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등하고, 월세 올려달라는 집주인 전화에 옥탑방 마당에서 동네 지붕만 내려다 보고, 로또집 앞에 길게 줄을 선 채 ‘이번 주는 제발…’ 주문을 걸어보고, 모두들 떠난 포장마차에서 등 돌리고 혼자 소주병을 비우고.

눈이라기보단 차라리 마음에 담았을 풍경들. 애써 외면하지 않고, 그 위에 저린 감정 한 줄 더 올릴 수 있었다면 아마 여기 이곳도 낯설지 않을 거다. 크고 작은 나무액자에 차곡차곡 쌓아둔, 고단한 세상이야기가 말이다.

오상열의 ‘김 부장님,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세요’(2018). 작품은 모두들 떠나버린 길가 포장마차에서 혼자 소주병을 비우고 있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대신 어루만진다. 회색톤 배경에 딱 하나 빨간 간이의자에만 ‘색’을 입혔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어느 날 문득 길을 지나가는데 혼자서 술을 마시는 사람의 뒷모습이 얼핏 보였다. 저 모습이 내 모습일 수 있겠구나 싶더라.”

잔잔하게 펼쳐놓은 그 세상이야기에 지나가는 말처럼 소회를 얹은 이는 작가 오상열(41)이다. 작가는 서울 종로구 인사동길 선화랑에서 다섯 번째 개인전을 열고 있다. ‘삶의 순간, 순간들’이란 타이틀 아래 건 회화작품은 30여점. 세상의 모든 인생을 측은지심으로 부둥켜안은 듯한 작품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찾는 이들을 맞는다. 오고 가는 이들의 발길을 붙들기에도 부족하지 않다. 작가가 마음으로, 가슴으로 풀어낸 우리네 사연이 촘촘하게 들어찼으니.

△“월세 올려달라는데…” 그 혼잣말을 들었다면


낮이든 밤이든 온통 잿빛을 뿜어내는 도시다. 파스텔톤 화사한 꽃그림을 나란히 걸기도 했지만, 그리로 눈 슬쩍 돌리는 게 미안할 만큼, 작가는 척박한 도시생활을 밀착해서 들여다보는 중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타지에서 가난한 작가로 시작해 살다 보니 만만치 않은 세상이 보였다. 그런데 그것이 비단 내 얘기만도 아니더라.”

오상열의 ‘귀가’(2016). 검정비닐봉지 하나 들고 터덜터덜 언덕길을 오르는 어떤 이의 귀갓길을 좇았다. 또 다른 작품 ‘귀가’(2016), ‘집으로…’(2014·2018) 등 일터에서 돌아가는 이들의 쓸쓸한 뒷모습은 유독 작가의 눈과 붓을 붙들고 있다(사진=선화랑).


작가의 고향은 제주다. 제주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한 뒤 서울로 옮겨와 대학원을 다니고 작가생활을 시작했다. 그런 작가에게 서울이 푹신하고 말랑한 곳이었을 리가 없다. 그랬다. 무엇이 먼저랄 것도 없었단다. 한 번도 보지 못했던 공간이, 또 사람이 쏟아져 들어오더란다. “늦은 시간 편의점에서 나와 비닐봉지 하나 들고 축 처진 채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다.”

말 한 번 걸어보지 않은 그들이 그이의 그림 속에 이끌리듯 들어온 건 그때부터였다. 어두운 시간과 배경에 부분조명처럼 빛 한 무더기 뿌리고 그 곁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들을 그려넣었다. ‘귀가’(2016), ‘집으로…’(2018) 등 일터에서 돌아가는 이들의 스토리는 레퍼토리가 됐고, ‘오늘 저녁 뭐해 먹지’(2015), ‘혼밥’(2017), ‘접어야 되나 계속해야 되나’(2018), ‘어디로 가야 하나’(2018), ‘월세 올려 달라는데…’(2019), ‘이번 추석에는 애들 오려나…’(2019), ‘가게 문을 닫아야 하나…’(2019) 등등이 연이어 나왔다.

오상열의 ‘제발 1등만 돼라’(2018·왼쪽)와 ‘가게 문을 닫아야 하나’(2019)가 전시장에 나란히 걸렸다. 로또가게 앞에서 줄을 서든, 손님 없는 가게라도 지켜야 하든, 작가는 어느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우리 가족과 이웃이 사는 이야기를 담아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특징이 있다면 하나같이 카메라를 들고 뒤를 따르듯 원거리에서 잡아낸 장면이란 것. 이는 작가의 작품이 늘 누군가의 뒷모습만 좇는 일과도 무관치 않다. “앞모습을 그리면 얼굴에 집중하게 되지 않나. 주제를 전달하기에 어려움이 있더라.” 맞다. 게다가 뒷모습은 거짓말을 하지 못한다.

회색 배경에 포인트컬러 하나로 시선을 꽉 붙드는 기법도 특별하다. 스티븐 스필버그가 흑백으로 만든 영화 ‘쉰들러 리스트’에서 딱 한 장면, 어느 소녀에게 입혔던 ‘빨간색 코트’의 효과라고 할까. 혼밥을 하거나 집으로 가는 장면에선 파란 셔츠에, 가게나 포장마차 장면에선 붉고 푸른 간이의자에, 옥상과 로또집, 아파트 복도 장면에선 옷 밖으로 외롭게 빠져나온 팔에만 ‘색’을 줬다.

오상열의 ‘월세 올려달라는데…’(2019) 부분. 조금 전 집주인의 전화를 받았을 거다. 그전까진 잔뜩 마음만 졸였을 테고. 집 없는 사람의 서러움을 측은지심으로 부둥켜안은 섬세한 붓질이 보인다(사진=선화랑).


우울감이 폴폴 번지는 색과 구도라고 희망까지 뭉개버린 건 아니다. ‘내일은 내일의 해가 뜰 겁니다’(2016), ‘야호, 합격이다’(2017), ‘자기야, 승진했다면서’(2018), ‘김 부장님,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세요’(2018), ‘제발 1등만 돼라’(2018) 등 위로와 위무로 우리의 어깨를 토닥이는 작품도 적지 않으니까. 언뜻 비치는 위트와 유머가 먹구름 사이 햇살처럼 반짝 꽂혔다고 할까.

△어울려 세상 사는 법…‘잿빛의 반전’

무리지어 집단을 이룬 군중 틈새에 나홀로 놓인 황망함을 다루기도 했다. 광장에 점점이 흩어진 그들에 차마 섞일 수 없는 우리의 고립감을 그려낸 작품들이다. ‘어디로 가지’(2016), ‘스마트폰 세상’(2016), ‘칫 저게 뭐가 재밌다고’(2018), ‘저게 재밌니’(2018) 등. 앞선 작품들이 절대적인 고독을 그렸다면 뒤따른 것들은 상대적인 고독을 말하려 했을 터. 종국엔 이 모든 단계를 다 거쳤다 싶었던 건지. 최근작은 많이 화사해졌다. 꽃바람이 휘날리는 거리를 사뿐히 걷고 있는 여인을 화면에 ‘띄우는’ 중이니까. 연작 ‘아름다운 날들’(2020)이다. “그림을 그리면서 아름다웠던 순간도 떠오른다. 세상이 어둡기만 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안 좋은 날이 있다면 반드시 좋은 날도 오게 돼있으니까.”

오상열의 ‘아름다운 날들’(2020). 작가의 반전이 있는 최근작은 온통 노랗고 불그스름하다. 작가는 “그림을 그리면서 떠올린 현재 혹은 미래의 아름다운 순간”이라고 했다(사진=선화랑).


작가는 선화랑이 매년 첫 기획전으로 여는 ‘예감전’에 2016년 작가로 참여했다. 현재 맹렬히 활동하고 있는 남재현(39), 문선미(51), 문호(41), 이상원(42), 이영지(45) 등이 그해 ‘예감전’ 동기들이다. 무채색 작품을 보고 밤에 작업을 하겠거니 하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매일 규칙적으로 오전 9시부터 붓을 잡고, 자정 전엔 끝낸다고 했다. 뜯어볼수록 애정어린 디테일이 살아있는 만큼 완성에는 적잖은 시간이 걸린다. 100호를 마감하는 데 한 달 정도 잡는단다.

작가 오상열이 개인전 ‘삶의 순간, 순간들’에 건 자신의 작품 ‘칫 저게 뭐가 재밌다고’(2018·왼쪽)와 ‘저게 재밌니’(2018) 사이에 섰다. 섞이지 못했다면 차라리 내가 외면한 것으로 해두는 게 낫다. ‘군중 속의 고립감’을 그린 작품 중 언뜻 비치는 위트와 유머가 돋보인다(사진=오현주 문화전문기자).


‘이 어려운 시절에 잿빛이 뭐냐’는 얘기도 듣는 모양이다. 하지만 모르는 소리다. 삶의 무게가 바닥을 치면 비로소 다른 사정이 보이는 법이니까. 주위에 시선이 가고 손길이 가면서 의도하지 않은 연민이 생기고 생각지 못한 위안이 안기니까. 바로 어울려 세상 사는 일을 말한 ‘잿빛의 반전’이다. 그러니 기꺼이 위로를 받고 공감하라고 한다. 작가의 그림들이 그리 말한다.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던 저들이, 혼잣말만 울리던 저들이 이제야 돌아보고 말을 건넨다. 전시는 7월 7일까지.

편히 읽히는 기사는 있어도 쉽게 쓰는 기사는 없는 법. 그래서 갑니다. 자꾸 가겠습니다.

오현주 뉴스룸 오현주

주요 뉴스

ⓒ종합 경제정보 미디어 이데일리 - 상업적 무단전재 & 재배포 금지

영상 뉴스

더보기

오늘의 포토

더보기

카드 뉴스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