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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반도체 합종연횡…각국 경쟁당국 손에 달렸다

김상윤 기자I 2021.09.02 06:00:00

자국 산업정책 지원이냐 반독점 해소냐 갈림길
국가안보 우려..영국, 중국 경쟁당국 제동 움직임
테크기업 반독점에 칼 대는 미국..딜레마 빠져
한국 공정위, 삼성전자 위해 적극 반대 나서나

[이데일리 김상윤 기자] 자국 반도체 공급망을 강화하려는 각국의 움직임이 확대되고 있지만, 독과점을 막고자 하는 경쟁당국의 ‘칼’이 최대 변수로 작용하고 있다. 그간 반도체 시장은 국제 분업체계를 구축해 효율성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지만, 이젠 안보차원에서 자국 내 분업체계로 전환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 과정에서 자칫 특정 기업에 지배력이 쏠릴 경우 다른 기업이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경쟁당국이 개입할 수밖에 없다.

경쟁당국이 다른 나라의 산업정책을 막는 도구로 활용되거나 오히려 자국 내 기업을 지원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등 ‘양날의 칼’이 될 공산이 커진 셈이다.

(사진=이미지투데이)
◇자국 산업정책 지원이냐 반독점 해소냐 갈림길


31일 외신 등에 따르면 반도체업계 사상 최대 규모의 인수·합병(M&A)으로 관심을 모았던 미국 엔비디아의 영국 반도체 설계회사 ARM 인수가 삐걱대고 있다. 테슬라와 아마존, 퀄컴 등 미국 테크 기업들이 반대에 나서고 있는데다 중국, 유럽연합(EU) 등에서 이번 M&A에 견제에 나설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1990년 영국에서 설립한 ARM은 삼성전자·애플·퀄컴 등 세계 1000여 기업에 반도체 기본 설계도를 만들어 제공하고 사용료(로열티)를 받고 있다. 통상 반도체 설계디자인을 하는 회사를 팹리스(fabless)라고 불리는데, 대부분 팹리스는 ARM의 기본 설계를 바탕으로 자사의 기술을 더해 최종 설계도를 만든다. ARM이 ‘팹리스계의 팹리스’라고 불리는 이유다. 세계 스마트폰의 90% 이상, 태블릿PC의 85%가 ARM이 기본 설계한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를 사용하고 있다.

스마트폰 시장이 포화가 되면서 ARM의 수익성이 약화되자 이 회사는 2016년 일본 소프트뱅크에 팔렸다. 하지만 위워크, 우버 등 스타트업이 코러나19 등으로 어려움을 겪자 현금이 필요한 소프트뱅크는 엔비디아에 다시 매각 추진 중이다. 엔비디아는 그래픽용 반도체(GPU) 회사이지만, 4차 산업혁명시대를 맞아 AI·자율주행 등 비메모리 반도체 분야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문제는 이번 인수로 반도체 설계분야에서 ‘수직계열화’가 생기면서 독과점 문제가 불거진 점이다. ARM의 고객인 엔비디아가 ARM의 ‘게이트 키퍼’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우려다. 로열티 가격을 인상하거나, 연구개발(R&D)을 엔비디아에 유리하게 끌고 갈 여지도 있다. ARM은 그간 중립적 위치에서 삼성전자, 퀄컴에 설계를 팔았지만, 이젠 ‘중립성’이 훼손될 우려가 커진 셈이다.

미국 내 빅테크인 아마존, 테슬라 등이 M&A 반대에 나서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들은 자체 반도체 개발을 선언하고 속속 자체 칩 개발을 추진하고 있다. 스마트폰 외에도 자율주행차, 대규모 서버, 스마트공장, 스마트 냉장고 개발에 반도체가 상당 부분 필요하다. 보편적인 비메모리 반도체가 아닌 자사 제품에 보다 특화한 지능형반도체(PIM)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는데, ARM이 엔비디아에 귀속될 경우 자사에 피해를 볼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미국의 M&A는 연방거래위원회(FTC)가 담당하고 있다. ‘아마존 저격수’로 불리는 리나 칸 위원장은 플랫폼, 테크 기업의 반독점 문제에 강하게 칼을 대고 있다. 하지만 반도체 패권 전쟁을 벌이고 있는 미국 바이든 정부의 눈치도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익명을 요구한 경쟁법 학자는 “경쟁당국은 기본적으로 소비자 관점에서 피해를 줄지 여부에 대해 따져야 하지만, 최근 글로벌 산업 패권 전쟁이 벌어지면서 경쟁당국의 정체성이 흔들리고 있다”며 “산업정책과 경쟁정책 사이에서 솔로몬의 지혜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언급했다.

영국 시장경쟁감시기구인 경쟁시장청(CMA)도 제동을 걸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CMA가 영국 문화부 장관에서 제출한 보고서에는 엔비디아의 ARM M&A가 국가 안보를 해칠 수 있다는 내용이 담긴 것으로 전해진다.

중국 경쟁당국은 아직 검토 절차를 시작했다고 밝히지도 않으면서 시간 끌기를 하고 있다. 중국은 보편적인 경쟁활성화 정책이 아닌 자국 기업 육성차원에서 경쟁당국을 활용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미국 퀄컴은 네덜란드 반도체 회사인 NXP 인수를 타진했지만, 중국이 M&A 심사를 지연하면서 결국 포기했다. ‘특허 공룡’ 미국 퀄컴이 미국과 중국 간 무역분쟁 희생양이 됐던 셈이다. 중국은 SK하이닉스의 인텔 낸드 인수와 관련한 심사를 차일피일 미루고 있다.

엔비디아, ARM 로고
◇삼성전자 타격받나…한국 공정위도 집중 심의


우리나라 공정거래위원회 역시 엔비디아-ARM 인수 건에 중점을 두고 조사를 하고 있다. 앞서 공정위는 “엔비디아가 반도체 설계 분야의 1위 업체인 ARM 인수를 통해 관련 시장을 봉쇄하는 등 경쟁이 저해될 우려가 있는지를 중점적으로 검토할 예정”이라고 밝힌 바 있다. 삼성전자는 반도체 설계·디자인과 파운드리(위탁생산)를 모두 하고 있기 때문에 팹리스 분야 경쟁자인 엔비디아의 지배력 강화가 불리할 수 있다. 그간 중립을 유지했던 ARM이 엔비디아의 영향을 받아 삼성전자에 불리한 거래를 요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대형 로펌 한 관계자는 “ARM이 인수 이후에도 반도체 제조에 필요한 ‘표준필수특허(SEP)’를 얼마나 공정하고 합리적이며 비차별적으로 제공할지 여부에 달려 있을 것 같다”면서도 “이번 건은 단순한 경제 현상을 떠나 외교·안보까지 엮여 있는 이슈라 각국의 경쟁당국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예단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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