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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대상 이 작품]판소리를 통해 체화한 풍자력과 고전이 지닌 통 시대성

김은비 기자I 2021.05.20 06:00:00

심사위원 리뷰
입과손 스튜디오 '레미제라블 토막소리 시리즈'

입과손 스튜디오가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을 원작으로 만든 판소리 ‘레미제라블 토막소리 시리즈’ 공연 모습.(사진=신촌문화발전소)
[현경채 국악평론가] 최근 판소리로 만든 ‘레미제라블 토막소리 시리즈’를 흥미롭게 관람했다. 소설 ‘레미제라블’ 원작 속 인물들의 삶과 사건, 그리고 작가 빅토르 위고의 사회적 시선에 집중해 창작된 공연이다. 이 작품은 ‘입과손스튜디오’의 최신작이고, 여러 점에서 주목해봐야 하는 문제작이다. 이 단체는 고전 문학작품을 통해 동시대의 공감을 얻어내는 능력이 탁월하다. 사회적 약자인 아이와 여자, 그리고 방황하는 청년에 주목했고, 극 중 인물들의 삶, 이들을 둘러싼 사건, 작가의 사회적 시선 등에 초점을 맞춰 3개의 토막 소리로 창작해 6개월간 순차적으로 발표하는 기염을 토했다. 외국 고전소설과 판소리 만남은 이색적이면서도 배우의 심리를 풀어줘 깊은 몰입감을 선사했고, 상황의 박진감을 더한 특유의 표현력은 고전의 무게에 재미를 더했다.

완창으로 하는 판소리는 긴 음악이지만, 초기의 판소리는 토막소리였다. 소리꾼 창작 능력이 조금씩 더 해지며 지금과 같이 긴 판소리가 완성됐다. 입과손스튜디오는 토막소리 개념의 소극장 공연을 3부작 시리즈로 선보이고, 이것을 묶어 하나의 완창형 판소리로 만들게 되는 방식을 시도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장발장의 이야기로 기억되는 소설 ‘레미제라블’을 판소리 토막소리 시리즈의 중장기 프로젝트로 진행하면서 3부작으로 선보였다. 첫 번째 이야기는 가난하고 아름다운 여자 ‘팡틴’(2020년10월23~24일)을 주인공으로, 19세기 프랑스 사회를 온몸으로 통과해 낸 그녀의 삶에 21세기 한국을 살아가는 여성을 투영한 작품으로 만들었다. 이승희의 열연으로 무대에 올렸다. 두 번째 이야기는 ‘마리우스’(2021년1월29~31일)라는 인물을 ‘신군’이라는 인물로 각색했다. 고수지만 소리꾼으로 활약이 대단한 신승태가 신군으로 분한 마리우스 역을 맡아 혁명가이며 동시에 사랑으로 아파하는 청춘의 마음을 다양한 민요로 노래했다. ‘마리우스’는 시대를 거쳐 사라지지 않는 불쌍한 청춘들의 고뇌와 분투에 집중하고자 한 작품이다.

토막소리 시리즈3 ‘가브로슈’(2021년4월30일~5월1일 신촌문화발전소)는 지난 ‘레미제라블’ 시리즈 중 전통 판소리와 가장 가까운 양식으로 구성됐고, ‘동시대 극장형 판소리 만들기’에 대한 입과손스튜디오의 고민을 소리꾼과 고수, 커다란 인형으로 꾸민 무대에 담아냈다. 프랑스 혁명을 배경으로 한 원작과 달리, 구한말 개화기로 시공간을 재구성했다. ‘가브로슈’는 혼란한 시대에 스스로의 삶을 꾸려가는 아홉 살 소년 ‘가열찬’으로 변화했고, 원작의 혁명 봉기자들은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했던 의병들로 각색됐으며, 개항으로 혼란한 사회 속에서 피폐해진 노동자 계급과 민중의 삶을 이야기했다. 각색이 아주 좋았다.

‘가브로슈’는 공동창작으로 만들었지만, 실제 무대에서는 소리꾼 김소진의 1인극과 고수 이향하, 김홍식의 멀티플한 악기 반주로 초연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완성도를 보여줬다. 김소진은 지난 2월 아르코 공연예술창작 산실 올해의 신작으로 초연된 ‘새판소리, 마당을 나온 암탉’(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1시간 40분 분량을 북 반주 하나에 맞춰 완창했다. 그 공연을 한 것이 고작 두 달 남짓이니, 짧은 시간에 ‘가브로슈’의 아홉 살 소년 ‘가열찬’으로 리셋한 것도 쉽지 않았을 텐데, 완벽한 노래와 연기로 관객의 마음 문을 열었고, 게다가 눈물까지 흘리게 했다. 김소진은 천진난만한 아홉 살 소년의 연기부터 늠름한 의병 역할과 일본 병사의 총에 맞아 죽음을 맞는 극적인 장면까지 실감나게 표현했다. 팀워크 좋은 ‘입과손스튜디오’의 창작 능력과 김소진의 놀라운 집중력의 승리라고 할 수 있다.

판소리를 통해 체화한 풍자력과 소설이 지닌 비판·풍자의 힘이 맞물려 ‘문학의 판소리화’ 무대가 심심치 않게 등장하고 있다. 입과손스튜디오의 이번 작업도 그러한 연장 선상에 있다. 그들이 보여준 ‘레 미제라블’ 속 인물의 이야기는 시대를 뛰어넘어 현재의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임을 드러낸 수작이다.

입과손 스튜디오가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을 원작으로 만든 판소리 ‘레미제라블 토막소리 시리즈’ 공연 모습.(사진=신촌문화발전소)
입과손 스튜디오가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을 원작으로 만든 판소리 ‘레미제라블 토막소리 시리즈’ 공연 모습.(사진=신촌문화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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