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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 지점장에서 소리꾼으로…외환위기로 인생2막 연 이용수 원장

권소현 기자I 2017.11.27 06:00:00
△이용수 국민문화연구원장이 21일 서울 종로 한 카페에서 1997년 외환위기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이 원장은 외환위기 당시 국민은행 지점장이었다가 명예퇴직을 한 전직 은행원이다. [사진=권소현 기자]
[이데일리 권소현 기자] “각 은행에 대한 평가가 발표되고 은행 통폐합 얘기가 나오기가 무섭게 뭉칫돈이 우리 지점으로 몰리기 시작했어요. 어느 은행은 불안하네 하면서 여기저기서 돈을 찾아가지고 오는데 신문지에 싸서 오는 사람, 보자기에 싸서 오는 사람, 수표 한 장으로 가져와 이자는 안 따지니 통장 하나 만들어달라는 사람. 큰 덩어리의 돈이 들어올 때마다 반갑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안 좋더라고”

KB국민은행 지점장을 지내다 외환위기 후 명예퇴직한 이용수(72) 국민문화연구원장은 지난 21일 서울 종로의 한 카페에서 만나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국민은행 정읍지점장이었던 1997년 11월 중순의 기억은 아직도 아프다.

사실 국민은행은 퇴출 대상이었던 다른 은행보다 사정이 나았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신청하고 국제결제은행(BIS) 비율 8%를 못 채운 은행들이 줄줄이 퇴출당하면서 그나마 안전하다는 국민은행으로 예금이 몰렸다. 바로 직전까지만 해도 은행 지역본부에서 매일 예금성적이 부진하니 하루빨리 만회하라는 독촉 전화에 시달렸지만 상황이 180도 달라진 것이다.

이 원장은 “한 때 우리나라 산업을 일으키는데 큰 공을 세운 은행들인데 어쩌다 이 지경이 됐을까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며 “예금은 이제 아무 의미 없이 넘쳤고 오히려 예금을 많이 받다 보면 수지면에서 애로가 생겨 또 다른 걱정거리가 됐다”고 털어놨다.

안전하긴 했지만 그래도 말로만 듣던 은행 빅뱅 시대가 오면서 국민은행 역시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피해 갈 순 없었다.

이 원장은 “은행마다 직장마다 명퇴 바람이 유행처럼 번졌다”며 “그땐 버티는 것이 의미가 없던 시절이어서 일단 나와 다른 일을 찾는 것이 현명하다 생각했다”고 그 시절을 떠올렸다.

광주상고를 졸업하고 1966년에 입행해 30년 넘게 몸담은 곳이었다. 삶의 터전이었던 곳을 나오려니 불안하고 서운하면서도 외로움이 밀려왔다.

이 원장은 “1만4000명의 동료로부터 떨어져 나가는 것이고 생활의 한 부분으로 자리 잡은 고객과의 거리도 멀어진다는 생각에 울컥했다”며 “생활비와 아이들 학비조달 같은 경제적인 문제와 결혼시킬 때 사돈 될 집에서 볼 시선 같은 현실적인 문제도 닥쳤다”고 말했다.

지난 2007년 3월24일 국립국악원 우면당공연에서 이용수 국민문화원장이 창작 판소리인 ‘왕과 대장금’을 열창하고 있다. [사진=이용수 원장 제공]
이 원장은 그래도 당시 같이 명퇴한 동료에 비해 잘 풀렸다.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판소리 동편제의 고향인 전북 남원 운봉에서 태어난 만큼 은행원 생활을 하면서도 틈틈이 판소리를 공부하고 연구했다. 지점장으로 일할 때 정읍국악교실을 열어서 판소리를 가르치기도 하고 산에 올라 등산객에게 무료강습을 해주기도 했다. 퇴직 후 이 원장은 판소리 창작과 공연, 책 집필 등으로 더 바쁜 날을 보냈다 .

이 원장은 “은행 지점장을 할 때에 비해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는 않았지만 후회하지는 않았다”며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고 말했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국민은 특유의 근성으로 IMF 체제를 조기에 졸업하고 그 이후로 눈부신 성장을 일궜지만 이 원장은 지금도 IMF시대와 다를 게 없다고 본다.

그는 “그때 우리가 좀 더 확실히 개혁하고 구조조정을 했으면 더 좋아졌을 텐데 너무 단기간에 풀리니까 지금 더 어려운 상황이 된 것 같다”며 “청년 실업이나 양극화와 같은 또 다른 문제가 경제 발목을 잡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원장은 요즘도 청계산 새벽 등반을 자주 한다. 청계산 582.5m를 오르면 국민은행이 기증한 팻말이 있다. 은행마다 산을 한두 개씩 맡아 관리하는 게 유행이었던 시절에 국민은행은 청계산을 맡아 기념으로 세운 팻말이다.

이 원장은 “만일 국민은행이 그때 없어졌다면 팻말도 사라졌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며 “은행도 역사성을 갖고 있는데 과거 외환위기 때의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잊으면 안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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