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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동물원 늑대 탈출 사건에 담은 버림받은 인간의 내면

장병호 기자I 2020.03.10 00:30:00

한태숙 연출 신작 연극 '대신 목자'
동물원서 벌어진 늑대 탈출 소재
관계 속 버림 받는 것의 의미 담아
전박찬·서이숙·성여진 등 열연 빛나

[이데일리 장병호 기자] 동물원을 가면 복잡한 심정이 된다. 쉽게 보기 힘든 동물들의 모습이 신기하다가도 한편으로는 측은한 마음이 생긴다. 좁은 우리 안에 갇힌 채 그것이 자신이 속한 세상의 전부라고 믿고 있을 동물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의 모습도 그와 다르지 않다는 생각에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지난 8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에서 마지막 공연을 한 한태숙 연출의 신작 연극 ‘대신 목자’. 당초 오는 15일까지 공연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여파로 아쉽게 일찍 막을 내린 이 공연은 동물원에서 느끼는 복잡미묘한 감정이 무대 위에 그대로 펼쳐진 수작이었다. 차갑고 삭막한 철조망과 외롭게 놓인 나무 덤불 등 무대 위 세트는 이런 감정을 더욱 증폭시켰다.

연극 ‘대신 목자’의 한 장면(사진=한국문화예술위원회).


작품은 동물원에서 벌어지는 늑대의 탈출 사건에서 출발한다. 동물원 우리에 갇혀 지내던 늑대 컹수가 어린 아이의 팔을 물어뜯는 사건이 발생한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수사관은 컹수의 사육사 유재를 추궁하지만 유재는 오히려 컹수를 감싸고 돌 뿐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컹수가 우리를 뛰쳐나와 동물원 뒷산으로 탈출하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진다.

늑대는 어떻게 동물원을 탈출하게 된 것일까. 그리고 이들은 어떻게 늑대를 찾아낼 것인가. 연극 초반 자연스럽게 이런 궁금증이 생긴다. 그러나 인간의 내면을 파고드는 작품을 선보여온 한 연출의 작품답게 연극은 이런 질문에 큰 관심을 두지 않는다. 오히려 늑대보다 유재에게 초점을 맞추면서 다른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버림 받는 것’에 대한 의미에 대해서다.

작품은 유재와 같은 사옥에 살고있는 어머니가 등장하면서 예상과 다른 분위기로 흘러간다. 유재는 컹수에게는 한없이 애정을 갖고 있지만 어머니와 어머니가 키우는 개 목자에게는 무척 쌀쌀맞다. 아들과 같이 살지만 늘 혼자 같은 어머니에게는 목자, 그리고 동네 수리공과의 만남이 유일한 낙이다. 이들 모자의 관계가 이렇게 된 이유가 있다. 어머니는 한때 가난함 때문에 유재를 버린 적이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유재를 데려왔지만 이미 이들의 관계는 파탄이 난 뒤였다.

연극 ‘대신 목자’의 한 장면(사진=한국문화예술위원회).


그렇게 ‘대신 목자’는 관계 속에서 버림받는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파고든다. 수사관은 컹수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며 유재의 책임 소재를 따지지만, 유재는 오히려 컹수를 감싼다. 컹수의 행동은 자신이 낳은 새끼의 죽음, 곧 뜻하지 않은 버림을 겪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유재가 사람들과 함께 컹수를 찾아나서는 작품의 후반부는 기이하면서도 신비롭다.

다소 어려운 주제지만 배우들의 열연이 극에 몰입하게 만든다. 유재 역의 전박찬과 수사관 역의 서이숙이 벌이는 팽팽한 대립이 극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어머니 역의 성여진은 아들에 대한 죄책감과 삶에서 느끼는 공허함 등 복잡한 감정을 소화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 ‘2019 공연예술창작산실-올해의 신작’ 선정작이다. 작품 제목은 극 중에 등장하는 개 목자와 ‘대신하다’를 합친 것이다. 한 연출은 “나도 어쩔 수 없는 외로운 동물이라는 자각을 하게 해 주었던 동물들을 생각하며 ‘대신 목자’를 썼다”고 말했다. 짧은 공연 기간의 아쉬움을 달랠 재공연을 바란다.

연극 ‘대신 목자’의 한 장면(사진=한국문화예술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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