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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사상태 '백남준 다다익선' 원형대로 살려낸다

오현주 기자I 2019.09.12 00:45:01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 1988년 설치한 비디오탑
화재 등 안전문제로 작년 2월부터 가동중단 상태
'브라운관 수리'로 복원작업가닥…2022년 재가동
"시대성 유지 미술관 임무…불가피할 땐 LED도입"
원형유지론 끝까지 못 피할 '임시방편' 논란 여전

불 켜진 ‘다다익선’(1988)과 불 꺼진 ‘다다익선’(2013). 1988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 설치된 이후 30년을 ‘버텨온’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의 ‘다다익선’은 지난해 2월 ‘누전에 따른 화재·폭발 위험’이란 공식 진단을 받고 상영을 전면중단했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이데일리DB).


[이데일리 오현주 문화전문기자] 높이 18.5m, 기단부 지름 11m의 원형 6층 영상탑을 차곡차곡 타고 오른 텔레비전 브라운관. 하늘이 열린 날(개천절)인 10월 3일에서 따왔다는 1003대의 ‘배가 볼록한 모니터’ 집합체. 1986년 제작에 들어가 1988년 완성·설치한 이후 30년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을 지켜온 무게 16t의 거대한 상징.

비디오아티스트 백남준(1932∼2006)의 대작 ‘다다익선’이 살아난다. 국립현대미술관은 11일 ‘다다익선’을 전면적으로 복원하는 방향·계획을 발표하고 “내년부터 3년간 수리·복원작업을 거쳐 2022년 다시 불을 밝히겠다”고 선언했다. 지난해 2월 ‘누전에 따른 화재·폭발 위험’이란 공식 진단명을 받고 상영을 전면중단한 이후 1년 7개월만의 결정이다. 그동안 ‘다다익선’은 회복이 불가능하고 수술도 어려운 ‘뇌사상태’로 무늬만 유지해왔던 터다.

가장 큰 관심과 논쟁을 부른 복원방법은 ‘원형대로’다. 미술관은 “작품의 시대성을 유지하는 게 미술관의 임무라는 결론을 내렸다”며 “원형유지에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전했다. ‘원형유지’는 지금의 브라운관(CRT) 모니터를 그대로 두고 수리·보완을 이어가겠다는 뜻이다. 이를 위한 근거로 미술관은 “아직 중고 모니터가 남아 있고 기술자도 있으니 CRT 모니터를 유지하는 게 불가능하지 않다”는 점을 들었다. 복원이 어려운 일부에는 신기술인 LED·LCD·OLED 등을 도입하겠다는 의지도 밝혔다. 바꿔 말하면 LED·LCD 등 모니터 교체를 완전히 배제하진 않으나 ‘CRT 모니터 사용이 불가능할 때’로만 한정하겠다는 말이다.

백남준의 ‘다다익선’. 탑의 위쪽으로 불 꺼진 모니터가 드문드문 보인다(사진=이데일리DB).


△생산중단한 CRT냐, 신기술 LED·LCD냐

결국 1003개 모니터에 불을 다시 켜는 ‘다다익선 복원 프로젝트’는 ‘CRT 원형유지+LED·LCD 보완’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에 따라 미술관은 2022년까지 3년간 순차적으로 ‘다다익선 살리기’ 작업을 진행한다. 2020년인 내년까지는 예산을 확보하고 CRT 모니터를 수집하고 LED·LCD 연구를 동시수행, 이어 2021년까진 모니터 복원에 착수, 2022년까진 시범 상영, 보완·후속작업을 하겠다는 계획이다.

이 같은 결정에는 크게 두 가지 점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하나는 ‘시대성’. 이날 ‘다다익선’의 복원계획을 발표한 박미화 학예연구관은 “그때의 모니터가 시대를 반영한다”며 “200년, 300년이 흘러도 당시의 시대성을 유지하는 게 미술관의 임무”란 점을 재차 강조했다. 이어 “LED·LCD로 교체하는 일은 오히려 쉽다”며 “유혹을 느꼈지만 공부를 할수록 그렇게 해선 안 되겠다는 생각이 강해졌다”고 덧붙였다.

다른 하나는 ‘LED·LCD의 한계’다. LED·LCD 복원은 외형은 유지하면서 모니터만 최신식으로 갈아 끼우는 보수가 주를 이룬다. 무엇보다 가볍고 에너지 소비를 줄이며 열 발생률 낮춰 화재 등에 강하다. 하지만 결정적인 것을 놓친다. 작품성이다. ‘다다익선’은 각각의 모니터가 CRT 모니터의 둥근 모양을 유지한 상태. 이를 납작한 LED·LCD로 교체한다면 아래나 위에서, 또 양옆에서 바라볼 때 시야각을 확보하기가 어렵다. 화면이 흐리거나 꺼진 듯한 번인 현상이 생길 수 있다는 거다. 게다가 원래의 4:3 비율도 보장할 수 없다.

미술관이 꼽은 이상적인 형태는 ‘마이크로 LED’다. 수명이 길고 시야각이 우수하며 색 재현율도 뛰어난 장점을 꼽는다. 하지만 문제는 가격. 상용화까지 적잖은 시간이 필요한 것도 장애다. 박 학예연구관은 “언젠가 마이크로 LED 기술이 상용화하지 않을까 한다”며 “그때까지 CRT 보완이 최선이란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생전의 백남준. 1987년 국립현대미술관 과천에 ‘다다익선’ 설치를 구상하던 때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


△백남준 유작 중 최대작…10년 수명 등 기술적 한계

‘다다익선’은 비디오아트의 창시자인 백남준의 유작 중 최대 규모다. 1988년 서울올림픽을 기념해 제작했으며 6인치 60대, 10인치 552대, 14인치 93대, 20인치 103대, 25인치 195대 등 1003대의 모니터를 비디오탑처럼 쌓은 구조다. 그러나 태생적 한계를 품고 있으니 ‘CRT 모니터의 수명’. 전문가들은 CRT 모니터의 수명을 10년 남짓으로 본다. 그럼에도 지난 30년간 가동이 멎을 때마다 중고 모니터를 찾아 땜질하는 식의 억지수명을 연장해왔던 거다. 수리 때마다 번번이 마지막이란 경고가 붙었던 데는 이런 이유가 있다.

‘다다익선’의 노후화 문제는 2002년부터 본격화했다. 화재로 가동을 중단하고 이듬해인 2003년 설치 15년 만에 모니터를 전면교체하는 대수술로 상황을 무마했다. 이미 작동이 안 되는 모니터가 50%를 넘겨왔던 터. 1988년 처음 설치 때 모니터를 전량 지원했던 삼성전자가 470대를 내놓고, 필요한 부품을 구하러 청계천 황학시장을 뒤지고 아프리카까지 헤집었다는 얘기는 유명하다. 검정 브라운관을 은회색으로 바꾼 것도 그때다. 당시는 백남준이 타계하기 전이라 협의가 수월하기도 했다.

이후에는 멀쩡했나. 그렇지 않다. 2010년 244대, 2012년 79대, 2013년 100대, 2014년 98대를 수리하고 교체하는 작업은 계속됐다. 그러다가 2015년 모니터의 1/3이 멈춰 섰고 320대를 갈아 끼우는 대대적인 수리를 단행해야만 했다. LED로 복원하자는 얘기가 스멀스멀 삐져나왔지만, 이때는 이미 백남준이 타계한 뒤라 미술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매한 상태를 유지해왔다. 그렇게 2년 8개월 뒤인 2018년 2월, 결국 모든 작동이 완전히 멈추는 단계에까지 이른 거다. 상단부에 누전현상이 발생하는 것을 확인한 직후였다.

백남준의 ‘다다익선’. 2015년 모니터 320대를 갈아 끼우는 대대적인 보수작업 이후의 모습이다(사진=ⓒ남궁선. 국립현대미술관).


그렇다면 백남준의 다른 비디오아트 작품들은 어떤 상태인가. 수명문제가 국내에서만 생기진 않았을 텐데. 참고할 만한 사례가 있다. 우선 독일 뒤셀도르프의 쿤스트팔라스트미술관이 소장한 ‘하늘을 나는 물고기’(1983∼85/ 1995). 전시장 천장에 달린 작품의 CRT 모니터 88대를 2016∼2017년 2년에 걸쳐 복원했다. 기존 CRT를 재생·복원하고 미래를 대비한 새로운 기술력은 확보해두는 방식이었다. 이유는 확실했다. ‘1960년대 유럽에서 성행한 CRT 역시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이란 거였다.

다른 사례로는 미국 휘트니미술관이 전시한 ‘세기말 2’(1989)가 있다. 휘트니미술관은 8명의 기술자·작가를 전담으로 배치한 뒤 2012∼2018년 7년여에 걸쳐 원형에 가까운 복원작업을 끝냈다. 기존 207대의 모니터 중 97대를 CRT로 수리·복원했고 LCD 모니터 5인치(18대), 10인치(110개)를 특별제작했다.

△CRT 복원엔 끝까지 따라붙을 ‘임시방편’ 논란

CRT 복원은 말 그대로 백남준이 만든 원형 그대로를 보존하겠다는 얘기다. 상징성은 크지만 몇 년 뒤 같은 문제가 또 생기지 말란 법이 없다. 이에 대해 윤양수 작품보존미술은행관리과장은 “당장 현재 CRT가 가능한데 왜 그걸 버리겠느냐”며 “사실 CRT가 단종된 지는 오래됐지만 중국에선 여전히 생산이 가능하고 한국의 지방이나 가정에도 필요한 수량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현재 1003대 전부가 아닌 200∼300여대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진단한 데다 미술관 보유분도 80여대가 있다는 거다.

백남준의 ‘다다익선’. 지난해 2월 ‘누전에 따른 화재·폭발 위험’이란 공식 진단을 받고 상영을 전면중단한 뒤의 모습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지난해 9월부터 ‘다다익선’을 빙 둘러 작품의 탄생·설치 배경 등을 담은 자료전 ‘다다익선 이야기’를 열고 있다(사진=국립현대미술관).


그러나 CRT 모니터를 사용하는 한 10년 수명 얘기는 끝까지 따라붙을 것이다. 마지막까지 영구대책이 아닌 임시방편 논란이 일 거란 소리다. 윤 과장은 그 해결책으로 작동시간을 줄여 수명을 늘리는 방안을 언급했다. “보통 CRT 수명을 10∼15년으로 잡고 있지만 작동시간을 줄인다면 15∼20년도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후 더욱 새로운 신기술 디스플레이로 바꿀 수 있지 않겠느냐고 했다. 실제 ‘다다익선’은 1988년 완성을 본 뒤 매일 거의 8시간씩 영상을 쏴왔던 터다.

완전 복원까지도 길이 멀다. 에너지 구조를 개선하고, 대중의 관심을 얻기 위한 자료를 정비하는 등. 미래의 유지·관리·보수를 보다 용이케 하기 위해 외부에서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도 고려한다. 종국엔 예산확보가 관건이 될 터. ‘다다익선 3개년 복원프로젝트’는 원형유지와 신기술 검토, 영상복원 등을 포함해 총 30억원을 소요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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